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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평가된 시인 4> 김종삼 결핍과 동경, 그리고 비애의 미학 강 연 호 | 시인 1. 김종삼 시의 재조명 우리 현대시사에서 이른바 1950년대 모더니즘과 이에 속한 일련의 시인들에 대한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어찌 보면 모더니즘은 그동안 우군보다는 적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정작 이 계열에 속하는 김수영, 김춘수 등이 이후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뚜렷한 성취를 보여준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얼핏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이러한 평가는, 그 자체로 혼란이 뒤섞인 현실이다. 당시 운동으로서의 역할은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모더니즘의 시사적 위상은 일정 부분 다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과 관련하여, 5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특히 김종삼金宗三의 시가 갖고 있는 독자적인 면모는 재조명되어야 한다. 같은 세대에 활동했던 김춘수나 김수영 등과 마찬가지로, 넓게 보면 김종삼 역시 모더니즘의 자장 속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시인이다. 연보에 의하면 1953년 「원정園丁」을 발표하며 등단하여 1984년 타계할 때까지 김종삼의 시작 활동은 30여 년에 이르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사실 그리 많다고 하기 어렵다.1) 그럼에도 그는 나름의 독특한 시적 성취를 보여주었으며 이를 통해 우리 현대시의 영역 확장과 질적 심화에 기여했다고 판단된다. 김종삼의 시에 대한 그간의 연구는 어느 정도 축적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논자에 따라 접근 방법과 과정에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극적 세계인식, 초월적 낭만주의, 보헤미아니즘 등을 그의 주요 시적 인식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또한 묘사와 절제, 여백의 잔상 효과, 장면의 제시 등을 기법상의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존의 논의들은 대체로 김종삼의 널리 알려진 대표작 몇 편을 통해 시세계 전체의 맥락을 개괄하는 정도일 뿐, 그의 시세계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제시나 체계적인 접근은 아직 부족하며, 무엇보다도 개별 작품들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여전히 미흡하다. 그러다 보니 동시대의 김수영이나 김춘수 등에 비하면, 김종삼의 경우는 그 시사적 위상 역시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김종삼의 시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이처럼 여전히 불투명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들 자체가 갖고 있는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시들은 표면적으로는 구조가 비교적 단순해 보이고 주제나 의미 역시 쉽게 드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자세한 분석을 시도하면 그렇게 만만하게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상당하다. 주관적인 감정 표현이나 정황 설명이 배제되고 극도로 생략된 묘사나 암시로 이루어진 시행들이 많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생각만큼 접근이 쉽지 않다. 또한 의미상의 모호성이나 애매성이 미학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구문 구조 자체가 불완전하거나 논리적으로 단절된 경우도 있다. 결국 김종삼의 작품들 자체가 깊이 있고 정치한 분석을 쉽게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시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맥락의 조망 역시 그렇게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종삼의 작품들은, 김수영의 그것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이른바 시적 완결에의 의지를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김수영의 시들이 묘사보다는 주로 산문적 진술에 의존하여 기존의 전통적인 시적 완결성을 거부했다면, 김종삼의 경우는 극도의 생략과 암시를 동원하거나 어눌하거나 난삽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리고 때로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림으로써 시적 완결로부터 벗어나 있다. 우리 현대시의 독법이 주로 의미나 내용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나름의 독특한 어조나 환상적인 분위기, 의도적 모호성 등을 내세우고 있는 김종삼의 시편들은 접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의 시 중에는 한편으로 동화 혹은 동시적 천진성으로 쉽게 읽히는 일련의 작품도 있는데, 이러한 극단적 양면성도 시세계 전체의 맥락 설정을 어렵게 했는지 모른다. 2. 현실의 결핍과 동경 김종삼의 시세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의 초기작부터 말년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계속 나타나는 원체험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논의에 의하면 김종삼의 비극적 인식은 전쟁과 실향이 주요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더 근원적으로는 김종삼의 개인사적 이력 가운데 가족의 죽음, 특히 아우의 때 이른 죽음과 고립 의식이 원체험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운동장」이나 「허공虛空」, 「아침」, 「사별死別」, 「어머니」 등의 작품에 그 아우(종수宗洙라고 하는)의 죽음과 그로 인한 상처가 직접 드러나 있다. 이러한 원체험은 김종삼의 작품에서 순결한 영혼의 아이와 현실 세계의 폭력성을 대비시키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삶을 영위해 나간다는 것은 점차 현실에 의해 더럽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은 현실 속에서 사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일이며, 따라서 순결한 아이들 역시 자라나면 죄를 짓는다는 태도로까지 이어진다. 그의 작품에서 “그 언제부터인가 / 나는 죄인”(「꿈이었던가?」)이라거나, “죄가 많다는 이 불구의 영혼”(「형刑」), 혹은 “나 지은 죄 많아 / 죽어서도 / 영혼이 / 없으리”(「라산스카」) 등과 같은 운명적 죄의식이 거듭 표출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그래서 “하늘 나라에선 / 자라나면 죄 짓는다고 / 자라나기 전에 데려간다 하느니라”(「음악」)라거나, “나는 이 세상에 맞지 아니하므로/ 병들어 있으므로/ 머지않아 죽을 거야 / (중략) / 양 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 되어서 / 죽을 거야”(「그날이 오며는」) 같은 결의가 표출되기도 한다. 개인사적 원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인식이, 이후 전쟁과 실향을 거치면서, 체제와 이념의 대립이 낳은 비극적 폭력성에 대한 고발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창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 「民間人」 부분 한 기슭엔 如前 雜草가, 아침 메뉴를 들고 校門에서 뛰어나온 學童이 學父兄을 반기는 그림처럼 복실 강아지가 그 뒤에서 조그맣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우슈뷔츠 收容所 鐵條網 기슭엔 雜草가 무성해 가고 있었다 ―― 「아우슈뷔츠」 부분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작품들은 무력과 전쟁으로 표상되는 세계의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아이들의 무고한 희생을 고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김종삼의 시에 나타나는 전쟁이나 학살 등의 소재는 대개 특정한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기보다는 현실 세계의 폭력성을 대변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의 시는 이처럼 현실 세계의 폭력성과 거기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작고 연약한 것들을 대비시켜 실체를 부각시키고 있다. 김종삼은 현실의 피폐함과 폭력성으로 인한 결핍을, 곧잘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환치시켜 보여준다. 그의 시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현실 너머의 어떤 세계에 대한 지향은 바로 현실 삶의 결핍과 그로 인한 동경이 만든 공간이다. 그해엔 눈이 많이 나리었다. 나이 어린 소년은 초가집에서 살고 있었다. 스와니江이랑 요단江이랑 어디메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눈이 많이 나려 쌓이었다. 바람이 일면 심심하여지면 먼 고장만을 생각하게 되었던 눈더미 눈더미 앞으로 한 사람이 그림처럼 앞질러 갔다. ―― 「스와니江이랑 요단江이랑」 전문 ‘스와니江’이나 ‘요단江’은 작품 속의 소년에게 “어디메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그 공간의 실재성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고립되어 있는 현실이 그 너머의 어떤 절대적 공간을 상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배경은 눈이 많이 내려 쌓인 곳이다. 아무 데도 갈 수 없이 고립되어 있지만 그럴수록 “먼 고장만을 생각하게 되었던” 낭만적 정서는 더욱 심화된다. 현실의 결핍이 부정적으로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한 동경 역시 더욱 깊어가는 것이다. 3. 내용 없는 아름다움과 비애 김종삼의 시는 가까이 있지 않은 어떤 순수의 세계에 대한 경사로도, 혹은 쉽게 다가갈 수 없어서 오히려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느껴지는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로도 읽을 수 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북치는 소년」 전문 이 작품의 1연에서 추상적으로 규정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은 2연과 3연에서 구체적 장면화로 나타난다. 가난한 아이에게 서양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는 사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 같은 실질적 도움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물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름답다. 가난한 아이에게 그것은 현실의 차원에서는 결핍을 보상해주지 못하지만, 그렇지만 환상의 차원에서는 언제나 꿈꾸고 있었던 동경을 충족시켜 준다. 양들의 등성이에 진눈깨비가 치는 장면도 현실의 차원에서는 험하고 궂은 날씨이지만 풍경의 차원에서는 아름다움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장면들은 물론 결핍과 동경이 낳은, 현실 세계 너머의 것들이기 때문에 환상에서 깨어나면 순간적으로 사라질 아름다움이다. 혹은 순간적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어떤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기는 하지만 비애가 섞여 있고, 비애가 섞여 있기 때문에 어떤 즐거움이나 환희의 아름다움보다 절실하다. 그런 아름다움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까. 논리적 분석이 가능한 아름다움이야말로 내용 있는 아름다움이겠지만, 그것은 김종삼의 인식 속에서는 어쩌면 현실 세계에 의해 치장된, 다시 말해 훼손된 아름다움일지 모른다. 노랑나비야 메리야 한결같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한결같이 마음이 고운 이들이 산다는 곳을 노랑나비야 메리야 너는 아느냐 ―― 「앤니로리」 전문 순진무구한 아이의 중얼거림 같은, 호명과 질문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분량으로도 내용으로도 소품에 가깝다. 하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한편으로는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끼게 한다. 천진성을 바탕으로 한, 이 순수의 미학에서 비애가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듭되는 호명과 질문의 이면에, ‘나는 모른다’거나 ‘알지만 나는 그곳에 갈 수 없다’는, 혹은 ‘그런 곳은 아예 없다’는 비극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김종삼 시의 비애에 주목한 김춘수는, “효용效用의 면에서 바라보면, 거기 무상성無償性이 있을 뿐이지만” 거기서 “우주적宇宙的 연대감”이나 “존재의 비애”를 포착할 수 있다고 하면서, 김종삼의 시에서 “가장 효용이 약한 듯이 보이면서도 시의 가장 근본문제를 발견하게 된다”2)고 언급한 바 있다. 김종삼 시의 미학적 본질에 대한 적절한 지적이라 하겠다. 4. 절대 순수의 미학 김종삼은 자신의 개인사적 체험과 상처에 의해 촉발된 존재의 비애를 일찍부터 포착했던 시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이념이나 역사적 맥락에 침윤되지 않은 예술의 미학적 순수를 추구한다. 여기서 미학적 순수란, 어쩌면 순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어떤 의도적 탈색이나 외면 같은, 그래서 그 역시 선택과 주장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오염된 순수가 아니라, 예술적 아름다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를 의미한다. 김종삼에게 있어서 순수의 미학은 언어의 조탁으로서의 의미도 아니고 이념의 배제로서의 의미도 아니다. 아예 언어 형식이나 이념 자체를 의식하지 않은 절대 순수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절대 순수의 경지에 어떤 의미나 내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앞의 작품 「북치는 소년」에 나오는 말처럼 그야말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일 것이다. 김종삼의 시는 말 그대로 내용 없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른바 내용 있는(그것이 이른바 순수이든 참여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아름다움에 오래도록 길들여져 있는 우리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그의 작품들은 충분히 개성적이며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자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는 없는 세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없는 세계를 꿈꾼다는 것은, 꿈꾼다는 것만으로도 없는 세계를 있게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김종삼이 추구했던, 현실의 결핍과 동경이 낳은, 현실 너머의 어떤 세계였을 것이다. 결론에 덧붙이자면 김종삼에 대한 기존의 소극적 평가는 그의 이러한 미학주의적 태도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현실의 고통이나 비극성과 맞서 싸우거나 대결하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 예술적·심미적 구원을 추구하는 태도는 우리의 문학 풍토에서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는 생전에 즐겨 듣던 클래식 음악과 함께, 시에서도 그러한 심미적 구원으로 현실의 결핍과 폭력성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보다는 서구에서 익숙한, 이른바 예술가 소설이라는 양식이 가능하다면 또한 예술가 시 역시 어색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 문학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수미학의 추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도 김종삼의 시세계는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1) 그는 생전에 『십이음계』(1969), 『시인학교』(1977),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1982) 등 세 권의 개인 시집과, 『북치는 소년』(1979), 『평화롭게』(1984) 등 두 권의 시선집을 상재한다. 2) 김춘수, 「김종삼과 시의 비애」, 『김춘수 전집 2 시론』, 문장, pp.437-441 강연호 1962년 대전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1995년 현대시동인상 수상. 시집 『비단길』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등이 있음. 현재 원광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문화로 하나되는 세상, 대한민국 NO.1 문화예술언론 <문화저널21> [저작권자 ⓒ문화저널21 (www2.mhj21.com) ] |
출처 : 시울문학
글쓴이 : 감마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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