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 노랫말 속에도 시가 들어 있다. 시보다 가볍고 시보다 빠르게 다가오는 노랫말. 이해되지 않는 난해시보다 가슴 속에 들어와 가슴을 베어가는 노랫말이 더 시가 될 때도 있다. 때로는 눈가에 눈물을 감돌게 하는 노랫말도 있다. 울림이 있고 마음을 흔드는 시 같은 노랫말 가운데 시인들은 어떤 노랫말을 좋아하고 흥얼거리는가. 원로시인에서부터 신예시인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현역시인 100명에게 <시인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을 설문하여 세 편씩을 알려달라고 하였다. 시인들은 왜 이 노랫말을 좋아하는가.
시인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
-100명의 시인 설문 응답 감태준 : <고향의 강>, <민들레 홀씨되어>, <밤에 떠난 여인> 강은교 : <님은 먼 곳에>, <봄비>, <푸르른 날> 고진하 : <아침이슬>, <안개(배호)>, <돌아가는 삼각지> 고찬규 : <봉숭아>, <킬리만자로의 표범>, <우리가 어느 별에서> 구순희 : <킬리만자로의 표범>, <너를 사랑하고도>, <서른 즈음에>
권대웅 : <가시나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권오운 : <선창>, <봄날은 간다>, <갈대의 순정> 나금숙 : <사랑의 썰물>, <상아의 노래>, <정 주고 내가 우네> 김경미 : <꽃잎(김추자)>, <찬비>, <겨울 바다> 김광림 : <그리운 금강산>, <방랑시인 김삿갓>, <봄이 오면>
김금숙 : <봄날은 간다>, <개여울>, <찔레꽃> 김문희 : <길 잃은 철새>, <만남>,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김백겸 : <서울서울서울>, <황포돛대>, <사의 찬미> 김상미 : <봄날은 간다>, <꽃밭에서>, <못 찾겠다 꾀꼬리> 김완하 : <북한강에서>, <킬리만자로의 표범>, <시인의 마을>
김왕노 : <초우>, <그 겨울의 찻집>, <봄날은 간다> 김요일 : <제비꽃>, <꽃잎>, <나의 기타 이야기> 김은정 : <나는 문제없어>, <쇼>, <오랜 침묵은 깨어지고> 김재석 : <외나무 다리>, <사의 찬미>, <산 너머 남촌에는> 김정수 : <한계령>, <보이지 않는 사랑>, <사랑으로(녹색지대)>
김종미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때 그 사람> 김종철 : <동백아가씨>, <밤에 떠난 여인>, <황성 옛터> 김종해 : <한오백년>, <황성 옛터>, <짝사랑(고복수)> 김 참 : <머리에 꽃을>, <때>, <나비> 김춘수 :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번지 없는 주막>
노혜경 : <그 겨울의 찻집>, <신비>, <환상 속의 그대> 문정영 : <직녀에게>, <개여울>, <푸르른 날에> 문정희 : <안녕(배호)>, <빛과 그림자>, <초우> 문인수 : <황성 옛터>, <목포의 눈물>, <꿈꾸는 백마강> 박경석 : <고향 만리>, <낙화유수>, <번지 없는 주막>
박서영 : <가을 우체국 앞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 <우리가 어느 별에서> 박완호 : <아침이슬>, <한계령>, <떠나가는 배> 박의상 : <해변의 여인>, <가을 편지>, <영영> 박이화 : <잊혀진 계절>, <님그림자>, <사랑밖엔 난 몰라> 박종국 : <고향 무정>, <이별(패티김)>, <만남>
박주택 :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떠나가는 배>,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박진성 : <내가 만일>, <나의 노래>, <너를 보내고> 변의수 : <엄마야 누나야>, <너는 누구인가>, <모든 것 끝난 뒤> 서규정 : <빙글빙글>,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잃어버린 우산> 서정춘 : <부용산>, <낙화유수>, <봄날은 간다>
서지월 : <비 내리는 명동>, <산포도처녀>, <그리운 희야> 성귀수 : <북한강에서>,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손순미 : <눈동자>, <당신은 몰라>, <봄날은 간다> 손정순 : <킬리만자로의 표범>, <꿈의 대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손택수 : <향수>, <이별 노래>, <봄날은 간다>
손현숙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하늘색 꿈>, <작은 배> 신달자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이별(패티김)>, <애모> 신현림 : <서울 야곡>, <사랑한 후에(전인권)>, <립스틱 짙게 바르고> 안도현 :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옛 사랑> 양애경 : <가시나무>, <봄날은 간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여태천 : <외로운 사람들>, <서른 즈음에>, <너를 보내고> 오탁번 : <울고 넘는 박달재>,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 우대식 : <직녀에게>, <한계령>, <우리가 어느 별에서> 이건청 : <모닥불>,<꿈꾸는 백마강>,<세월이 가면> 이경림 : <한계령>, <봄날은 간다>, <옛 시인의 노래>
이근배 : <상처>, <존재의 이유>, <해후> 이기와 : <그때 그 사람>, <낭만에 대하여>,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병률 : <봄날은 간다>, <가시나무>, <마른 잎> 이산하 : <코뿔소>, <한계령>,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이선영 : <사랑이야>, <킬리만자로의 표범>, <지금>
이수익 : <북한강에서>, <그대 있음에>, <가시나무> 이 원 : <무궁화>, <새>, <free style> 이유경 :<사랑을 위하여>, <그 얼굴에 햇살을>, <당신은 모르실 거야> 이윤학 : <킬리만자로의 표범>, <산장의 여인>, <내가 만일> 이장욱 : <분명하게>, <하여가>, <어머니와 고등어>
이재무 : <안개 낀 장충단 거리>,<추억의 백마강>, <공항에 부는 바람> 이정록 : <불효자는 떠납니다>, <탁발승의 새벽노래>, <시인의 마을> 이진우 : <별이 진다네>, <겨울 애상>, <서른 즈음에> 이 탄 : <봄날은 간다>, <선창>, <소양강 처녀> 이희중 : <가을은>,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홀로 남은 밤>
임동확 : <푸르른 날>,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허공> 장석남 : <꽃밭에서>, <나뭇잎 사이로>, <꽃, 새, 눈물> 장석주 : <창밖의 여자>,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허공> 장옥관 : <가시나무>, <봄날은 간다>, <우리는> 장인수 : <킬리만자로의 표범>, <아버지의 의자>, <북한강에서>
전동균 : <떠나가는 배>,<상아의 노래>,<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전수련 : <이등병의 편지>,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겨울 애상> 전윤호 : <달팽이>, <그대 있음에>, <겨울 애상> 정끝별 : <봄날은 간다>, <산 팔자 물 팔자>, <사의 찬미> 정숙자 : <봄날은 간다>, <칠갑산>,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정 영 : <친구>, <가시나무>,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정유화 : <고래 사냥>, <나를 두고 아리랑>, <그때 그 사람> 정진규 :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사랑의 미로>,<북한강에서> 조말선 : <북한강에서>, <거리에서>, <그 겨울의 찻집> 조영서 : <동백아가씨>, <부용산>, <타향살이>
조원규 : <불꽃>, <아이들은>, <내가 만일> 조윤희 : <제비꽃>, <서른 즈음에>, <봄날은 간다> 조 은 : <실버들>, <가을 편지>,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조현석 : <북한강에서>, <킬리만자로의 표범>, <한계령> 진은영 : <나의 노래>, <달팽이>, <귀뚜라미>
차창룡 : <누나의 얼굴>, <북한강에서>, <봉우리> 채풍묵 : <선운사>, <북한강에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천양희 : <봄날은 간다>, <허무한 마음>, <백치 아다다> 최서림 : <새는>, <고목>, <그 겨울의 찻집> 한미영 : <옛사랑(이문세)>, <쓸쓸한 연가>, <직녀에게>
함민복 : <아침이슬>, <님 그림자>, <배신자> 홍윤숙 : <창밖의 여자>, <사랑을 위하여>, <존재의 이유> 황금찬 : <외로운 부두>, <고도의 정한>, <두만강> 황인숙 : <꽃잎>, <지금 우리가>, <큐> 황희순 : <북한강에서>, <아씨>, <애고 도솔천아>
시인들의 18번 -100명의 시인 설문 조사 분석 오 광 수 | 시인·경향신문 주말팀장
미당未堂은 그의 절창 '꽃밭의 독백'에서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구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고’라고 썼다. 생전에 그는 술이 거나해지면 ‘여보게, 거 창가唱歌 한 번 해보지’라고 말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후학들이 부르는 노래를 완상玩賞하곤 했다. 그에게 있어서 노래는 곧 시였고, 시는 노래였다. 그러나 노래나 시 모두 그가 꿈꾸던 구름 저쪽의 세상에는 닿지 못했던 것이다.
굳이 사료를 들추지 않더라도 노래는 시의 원형질이었다. 석기시대의 어디쯤 ‘시인의 피’를 가진 누군가는 가슴 저쪽에서 끓어오르는 그 무엇을 노래로 흥얼거렸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시인과 노래는 실과 바늘 같은 존재다. 다만 다양한 직업군들이 나뉘어지면서 타고난 감성을 가진 사람들은 시를 쓰고, 타고난 소리를 가진 이들은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시인들의 18번’이 공개된 이번 조사는 당대를 살아가는 시인들의 대중적 취향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18번이 <방랑시인 김삿갓>이었다거나, 노태우 전대통령은 <베사메무초>였다는 건 알면서도 ‘시인들의 18번’을 몰랐다는 게 어디 말이 되는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봄날은 간다
조사 결과 압도적인 점수로 1위에 오른 <봄날은 간다>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대구에서 여가수 백설희가 발표한 곡이다. 손로원이 쓰고 박시춘이 작곡했다. 손로원은 일제 치하에서는 한 줄의 가사도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가 해방과 함께 손석봉이 부른 <귀국선>을 필두로 왕성한 활동을 재개한 작사가이다. 아니러니하게도 작사가 손로원은 노랫말 때문에 두 차례에 걸쳐 경찰에 끌려간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중 한 번은 그가 작사한 <비내리는 호남선> 때문이었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로 시작되는 이 노래가 유행한 건 1956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맞서 대선전에 나선 해공 신익희는 호남 유세 도중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이 와중에 <비 내리는 호남선>이 해공 신익희의 미망인이 설움에 겨워 작사한 노래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이 때문에 손로원은 경찰 당국에 연행되어 치도곤을 당했던 것이다.
“물레방아 돌고 도는 내 고향 정든 땅…”으로 시작하는 <물레방아 도는 내력>도 자유당 말기 세태를 풍자했다 하여 경찰에 끌려가야 했고, 끝내 금지곡이 되는 수모를 당했다. 그는 이들 노래 외에도 <페르시아 왕자> <인도의 향불> <홍콩 아가씨> 등의 노래를 작사했다. 곡을 붙인 박시춘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 <신라의 달밤> 등 히트곡만 300여 곡이 넘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다.
<봄날은 간다>의 2절 가사 중 ‘청노새 짤랑대던 역마차 길에’ 부분은 처음 발표된 SP음반에는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로 돼 있으나 어떤 연유로 개작됐는지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여하튼 한영애가 리메이크하고, 허진호 감독이 동명의 영화까지 만든 걸 보면 아직 봄날은 가지 않은 모양이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로 시작되는 조용필의 대표곡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시로 따지면 장편 서사시라고 할 만큼 긴 노래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출신의 드라마 작가이자 작사가인 양인자 씨가 노랫말을 썼고, 그의 부군인 김희갑 씨가 곡을 붙였다. 두 부부가 수많은 히트곡을 낸 콤비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0위권 안에 오른 조용필의 또 다른 곡 <그 겨울의 찻집> 역시 양인자 씨의 작품. 이 노랫말의 모티브는 E.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에 일정 부분 기대고 있다. 헤밍웨이는 “킬리만자로의 정상 부근에 얼어죽은 표범의 시체가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라고 소설의 서두를 시작했다.
이 노래는 1986년 조용필의 8집에 수록된 <허공> <바람이 전하는 말> <그 겨울의 찻집> 등과 함께 발표되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당시 뭔가 변화가 필요했던 조용필은 평소 친분이 있던 김희갑·양인자 부부에게 곡을 의뢰했다. 양인자 씨가 ‘짧은 노랫말로는 성이 안 찬다’고 해서 랩을 포함하여 6분짜리 대곡이 나온 것이다. 레코드사에서 너무 길어서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줄여주길 원했지만 작품자들의 고집으로 세상에 나왔다.
10위권 내에 든 노래들 중에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4위), <한계령>(5위), <아침이슬>(6위)은 모두 양희은의 청아한 목소리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곡이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양희은과/양희은의 비겁할 줄 모르는 통기타/치사할 줄 모르는 노래/이 셋이 시대의 자유를 꿈꾸었다 모두와 함께’라고 썼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70년대에 암울했던 청춘을 보낸 모든 이들은 일정 부분 양희은의 노래에 빚지고 있다. 시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이들 노래 중에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1991)는 그가 직접 노랫말을 썼으며, <아침이슬>(1971)은 김민기, <한계령>(1985)은 하덕규가 각각 썼다.
70년대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에서 김민기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 시대에 누구든 김민기와 한대수, 양병집 등 소위 판매금지된 LP를 구하기 위해 애쓰고 그 노래를 들으며 가슴 뜨거워지지 않았던 이가 있을까. 그 절정에 있었던 노래가 김민기의 <아침이슬>임을 누구든 부인할 수 없다.
김민기의 막강한 지원 아래 양희은은 가수생활을 시작했지만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여학교 시절에 맞았던 부모의 이혼, 돈 때문에 늘 절망해야 했던 대학시절, 80년대초 도피하듯이 떠났던 미국과 유럽 여행, 암투병, 뒤늦은 결혼과 해외 이주 등. 지금은 넉넉한 아줌마로 우리 곁에서 편안하게 노래하는 양희은과 <지하철 1호선>을 장기공연하면서 기획자로 자리잡은 김민기. 그들이 만들고 부른 노래만큼이나 신산했던 역사가 두 사람에게도 있었다. 그들이 겪었던 70년대와 80년대의 풍경이 시인들이 겪었던 그 시대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기에 그들의 노래가 사랑받을 수 있었으리라.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네/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내 가슴을 쓸어내리네/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떠도는 바람처럼/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존경하는 선배 양희은에게 <한계령>을 써서 헌사한 하덕규는 알다시피 ‘시인과 촌장’으로 데뷔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싱어송라이터다. 그의 또 다른 노래 <가시나무> 역시 시인들이 좋아하는 주요 노래 중 하나로 꼽혔다. 그의 선배격인 가수 조동진의 느릿느릿한 포크에 영향을 받은 하덕규는 시적인 상상력과 언어구사가 탁월한 가수였다.
나중에 후배가수 조성모가 리메이크하여 밀리언셀러가 됐던 <가시나무> 역시 시적인 언어와 상상력으로 가득 찬 노래다.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고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하덕규에게 한계령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눈만 뜨면 안개를 두르고 묵묵히 서 있는 한계령이 온전히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10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해온 그에게 고향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찾는 마음의 도피처였다. 스물여섯 살 여름, 홍익대 미대에 재학중이던 그는 ‘시인과 촌장’을 결성하여 노래를 발표했지만 방황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죽음까지도 생각했던 그 무렵 다시 한계령을 찾았고, 게서 <한계령>이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에는 CCM에 심취하여 대중적인 노래를 부르지 않는 그가 그리운 이유는 탁월한 시적인 감성을 가진 새 노래들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정태춘을 얘기해야 한다. 그의 처음을 기억하는 이들은 어쩌면 ‘소리없이 어둠이 내리고/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으로 시작하는 <촛불>과 <시인의 마을> 등의 노래로 기억할 것이다. 시인들이 좋아하는 노래 3위에 오른 <북한강에서>를 비롯해 <떠나가는 배> <사랑하는 이에게> 등의 노래는 마치 유장한 서사시를 방불케 하는 대작이다.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릴 들으려 했소/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사실 정태춘은 7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가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통기타 가수와는 다른 느낌을 가진 가수다. 그는 대학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으면서도 대학이 가진 이상이나 낭만, 열정 이상의 것을 노래로 쏟아부은 가수다. 특히 동료가수 박은옥과 결혼한 뒤 보여준 전투적이면서도 서사적인 전사의 풍모는 그가 단순한 대중가수가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특히 그는 줄기찬 투쟁 끝에 대중들의 상상력을 억눌러온 ‘사전 심의제’를 철폐하는 데 공헌했으며, 운동권 대학생들의 집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투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는 선동적이거나 직설적이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그가 일찍이 고백했듯이 선배가수 김민기의 영향이 컸다.
한때 레오나드 코헨이나 존 바에즈, 비틀즈나 에릭 클랩튼을 들으면서 풍성한 노랫말에 감탄하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같이 숨쉬면서 살아가는 동시대 가수들도 음유시인으로 칭송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중음악이 상업화로 치달으면서 가사는 전자음의 소음에 묻혀 버렸고, 운율은 빠른 비트에 희생됐다.
노래는 시보다도 먼저 우리가 살아가는 풍경을 반영한다. 시보다도 훨씬 대중적인 매개체인 노래가 시대를 재빠르게 반영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스피드가 미덕인 시대에 댄스음악이 유행하고,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시대에 랩이 각광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느릿느릿 살아가는 것이 미덕인 시대가 온다면 다음 세대들이 <봄날은 간다>를 부르면서 완상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시인과 대중가요 -100명의 시인 설문 조사 분석 전 윤 호 | 시인
시와 노래 가사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세계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시인들과 대중가요의 가사는 상호 교류가 많은 관계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시인의 경우는 대중가요와 일정한 금을 긋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참여가 미미하다. 이번 조사는 시인들이 우리의 대중가요 가사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조사를 위해서 원로시인에서부터 신예시인에 이르기까지 시인 100명에게 가사가 좋다고 생각되는 대중가요 3편씩을 고르도록 요청했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시인들은 김춘수, 황금찬, 홍윤숙, 김광림, 정진규, 이근배, 신달자 같은 원로, 중진급 시인에서 안도현, 함민복, 장석남, 이산하, 이윤학, 성귀수 같은 젊은 시인들까지 망라돼 있다.
차별을 두기 위해 가장 좋은 것 순으로 세 곡씩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에 순위를 매겨 1위 곡은 3점, 2위는 2점, 3위는 1점으로 통계를 냈다. 응답한 시인과 노래들은 전기한 바와 같고 통계를 내서 점수 합산으로 10위까지 고르고 점수에 관계없이 표수로 등수도 매겨보았다. 애초의 취지를 살려 등위별로 점수를 매긴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봄날은 간다> ― 34점 2. <킬리만자로의 표범>― 23점 3. <북한강에서> ― 22점 4.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15점 5. <한계령> ― 11점 6. <아침이슬> ― 9점 7-8.<가시나무> ― 8점,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 8점 9-10. <그 겨울의 찻집> ― 7점, <황성 옛터> ― 7점
그리고 11위권으로 6점을 받은 <떠나가는 배>, <목포의 눈물>, <서른 즈음에>가 있다. 점수를 무시하고 단순히 표를 받은 수로 등위는 다음과 같다.
1. <봄날은 간다> ― 16표 2. <킬리만자로의 표범 > ― 10표, <북한강에서> ― 10표 4.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7표 5. <한계령> ― 6표 6-9. <그 겨울의 찻집> ― 4표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 4표 <서른 즈음에> ― 4표 <가시나무> ― 4표 10. <아침이슬> ― 3표 이하 모두 3표임, <떠나가는 배>, <목포의 눈물>, <겨울 애상>, <푸르른 날>, <황성 옛터>, <직녀에게>, <우리가 어느 별에서>, <사의 찬미>, <그때 그 사람>
그간 우리의 대중가요사에 발표된 곡의 수를 생각할 때 나이와 연령이 다르고 제각각 개성이 강한 시인들에게서 1표 이상의 표를 얻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라 생각된다. 선정 기준에 있어서도 어떤 시인은 가사만을 따지고 또 어떤 시인은 가사뿐만 아니라 노래도 좋아야 한다고 했으며 일부러 기성시인의 시를 가사로 쓴 것은 뺀 경우도 있는데 대체적으로 자신들이 좋아서 즐겨 부르는 노래들로 선정했기 때문에 빠르거나 비트가 강한 댄스곡이나 록보다는 노래방이나 주연에서 노래가 가능한 발라드나 전통가요가 많았다. 아무튼 상위 5위 <한계령>까지 점수별로나 표수별로나 같은 곡들이 나왔다는 것은 나이에 관계없이 고르게 지지했다는 결론이 된다.
1위를 한 <봄날은 간다>의 경우 원곡 외에도 한영애 같은 가수들이 꾸준히 리메이크를 한 덕도 있다고 할 것이다. 두 곡 이상이 선정된 작사가들이 받은 표를 순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 정태춘 ― 17명(5곡) <북한강에서>, <시인의 마을>, <애고 도솔천아>, <떠나가는 배>, <탁발승의 새벽 노래> 2. 양인자 ― 15명(4곡) <서울서울서울>, <킬리만자로의 눈>, <그 겨울의 찻집>, <큐> 3. 하덕규 ― 10명(2곡) <한계령>, <가시나무> 4. 송창식 ― 5명(5곡) <나의 기타 이야기>, <선운사>, <새는>, <사랑이야>, <우리는>
한편 노래를 부른 가수의 순위는 다음과 같다.
공동 1위 : 조용필 ― 18명(5곡) <서울서울서울>, <킬리만자로의 눈>, <그 겨울의 찻집>, <큐>, <허공> 정태춘 ― 18명(6곡) <북한강에서>, <시인의 마을>, <애고 도솔천아>, <떠나가는 배>, <탁발승의 새벽노래>, <봉숭아> 3. 양희은 ― 16명(3곡)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아침이슬>, <한계령> 4. 백설희 ― 16명(1곡) <봄날은 간다> 5. 송창식 ― 13명(9곡) <나의 기타 이야기>, <선운사>, <새는>, <사랑이야>, <우리는>, <상아의 노래>, <푸르른 날>, <그대 있음에>, <고래사냥>
송창식의 경우 가장 많은 곡이 선정됐으며 그 중에 문인의 가사가 3곡(서정주, 김남조, 최인호) 있다는 점에서 가장 문학적인 풍모를 지닌 가수라 할 만하다.
시와 가사가 일맥상통한다고는 하나 시인들이 좋아하는 가사들은 자신들이 쓰는 시에 비해 어느 정도 감정의 과잉이나 감상적인 측면이 용납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가사와 시의 차이점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면서 대중가요 가사를 본격적으로 쓴 경우는 많지 않다. 서정주, 김남조, 고은, 문정희, 정호승 시인 등의 기존에 발표된 시에 곡을 붙인 경우가 있는데 이번 통계에서는 아무래도 시는 분리해 생각하는 시인들이 있어 선정되는 데는 불리한 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중가요 가사의 문제점을 말할 때 흔히 거론되는 천편일률적인 사랑 타령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역시 시인들다운 안목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노래나 메시지가 강한 노래가 특별히 더 선호된 경향은 보이지 않으며 일상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노래들이 애호된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의 경우 시인들의 시가 곧 노래이기도 한 명곡이 많고 시인들이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아예 음유시인으로 대접받는 격조 높은 대중가수가 많다는 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경우는 시인들의 대중가요에 대한 인식이나 참여가 소극적이라 할 수 있다. 대중가요가 가장 발달한 영어권의 경우에도 시에 못지않은 격조 높은 가사들이 많은 데 비해 유독 동양문화권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대중문화를 경시하는 유교적인 문화의 영향 탓일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한국의 대중가요는 이제 한반도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문화상품이 되었다. 대중가요의 가사도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을 벗어나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야 할 때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들의 가요에 대한 사랑과 참여가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노랫말에 얽힌 30년대 문단 삽화
황 금 찬 | 시인
‘가곡'이란 말과 ‘가요’란 말이 있다. 이 말들은 어느 정도 구별이 되는 것 같다. 가곡은 시에다 곡을 붙이고 거기에 피아노 반주를 더한 곡을 의미하고 ‘가요’라 함은 노랫말 즉 가사에 곡을 써 대중화한 것(유행가)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옛날에는 노랫말과 시는 엄격하게 구별됐고 시인은 유행가의 노랫말(가사)은 쓰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던 것 같다.
30년대 중반에 김억 시인이 유행가의 노랫말을 쓴 일이 있었다. 그 제목은 <꽃을 잡고>이다. 그것이 작곡되어 가수 선우일선이 불렀다. 그것이 그 당시 말 거리가 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문학청년들이 김억 시인을 찾아가 항의를 한 일이 있었다. 우리의 대표시인이신 선생님이 유행가 가사를 쓰시다니요, 하고 항의하며 떠들어댔다는 것이다.
여기 얘기가 많지만 다 줄이고 김억 시인이 “이 사람들아, 나는 양복 저고리 한 개로 계절 없이 일 년을 입는 사람일세. 그 한 편 써주고 돈 5원 받았네. 그 돈으로 쌀을 다 샀네. 저쪽에서 크게 부탁도 하고 살기도 어렵고 해서 그리 되었으니 이해를 좀 해주게.”
그 말을 듣고는 문학청년들이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고는 다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좀 늦게, 요 얼마 전에 타계하신 윤석중 선생이 가사를 하나 썼는데 그것이 작곡되어 이난영이 불렀다. 그런데 그 가사는 시로 되어 있어서 대개가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어 한 20년 전에 내가 윤석중 선생께 <봄맞이>란 시는 언제 쓰신 것이냐고 물은 일이 있었다. 그분은 깜짝 놀라며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으셨다. 나는 웃으면서 “저는 다 알고 있습니다.” 했다. “선생님, 그 시는 유행가 가사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잃어버린 소망을 다시 찾게 해주는 희망의 시였습니다.” 선생님은 웃고 있었다.
“얼음이 풀려 물 위에 흐르니 흐르는 물 위에 겨울인가. 에헤야 봄맞이 가자.” 대충 이렇게 되어 있는 시다. 특히 ‘봄맞이 가자’에 힘을 두고 있다.
'꽃을 잡고'를 쓰신 김억 시인에게는 여러 가지 말도 있었지만 '봄맞이' 경우에는 별 말들이 없었던 것 같다.
1936~7년경에 우리들의 귀를 사로잡은 두 곡의 유행가가 있었다. 한 곡은 왕수복이 부른 <고도의 정한>이요, 또 한 곡은 선우일선이 부른 <조선팔경가>다. 이 두 곡 다 요즘 말로 하자면 히트곡이다. 그리고 왕수복과 선우일선 두 사람 다 평양에서 출발했다.
<조선팔경가>는 금수강산의 명소 즉 아름다운 곳을 전하려고 하는 데 그 노래의 목적을 둔 것 같고, <고도의 정한>은 견우와 직녀를 우리들의 처지에 비교하여 눈물의 애환을 그린 것 같다.
그 무렵 안창호 선생님이 상해에서 일경에게 끌려갔고, 급기야 서울로 이송되었는데 선생님의 병이 깊어 병원 근방에 방을 얻고 일경이 지키는 속에 투병하고 계셨다.
어느날 선우일선이 선생님을 찾아와 돈 50원을 드리면서 “선생님, 적은 것입니다. 어느 날 점심이라도 한번 드십시오.” 하며 드렸다. 선생님은 거절했다. 선우일선이 울면서 간청했다. 선생님은 돈 5원을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셨다. 선우일선이 눈물도 마르지 않은 얼굴로 나오다가 일경에 잡혀 옥고를 치른 일도 있었다. 그들은 가수였지만 나라 사랑의 마음은 한이 없었던 것 같다.
“칠석날 떠나던 배 소식 없더니…”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가 <고도의 정한>이다. 견우, 직녀 그들이 서로 헤어지고 만나지 못하는 것을 우리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으로 비유한, 우리들의 ‘애환’의 삶을 이끌어내는 노래이다. 왕수복은 이 노래로 유명해졌다.
1934년인가 그때 이효석이 평양 숭실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38년에 숭실대학이 폐교되었다. 그 무렵 평양에 대동공전이 문을 열었는데 이효석 교수는 그 학교로 옮겼다.
언제부턴지 그리고 누가 먼저 사랑의 문을 열었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왕수복이 이효석의 눈썹 같은 애인이었다는 것은 그 고장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다. 그뿐 아니라 이효석의 친구들도 다 알고들 있었다. 그 대동공전 학생 중에 내 친구가 있었다. 전상순이란 친구였다. 그 친구의 말을 여기에 옮겨 본다.
이 교수와 왕수복의 사랑 이야기는 전교 학생들에게도 다 알려지게 소문이 나 있었다. 친구 전상순을 위시하여 7인의 학생들이 왕수복 가수의 집을 찾아갔다. 왕수복은 학생들을 방으로 들게 한 후 말을 시작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 학생들이 여기까지 찾아왔습니까?” 하고 물었다. 학생들은 망설이다가 “우리 교수님을 사랑하지 마세요.” 했다. “왜요, 사랑하면 안 되나요?” “선생님은 폐가 좀 약하고 해서 사랑하면 안 됩니다.” “학생들 참 좋으시다, 교수님의 건강까지 근심하시니. 하지만 교수님은 여자가 사랑해야 더 건강해지세요. 학생들 무슨 차를 드릴까요, 커피 어때요?” “예.”
학생들은 처음 맛보는 커피를 마시고 나오면서 이구동성으로 죽어도 저런 여자를 사랑해 봤으면 했다고 한다. 이 노래만 부르면 왜 목이 메일까 -시인들이 좋아하는 노랫말 1위, <봄날은 간다> 천 양 희 | 시인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작사:손로원, 작곡:박시춘, 노래:백설희) 중에서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언니들이 부르던 유행가를 동요보다 먼저 따라 불렀다. 뜻도 모르고 귀동냥으로 배운 유행가를 어린 내가 왜 그토록 청승스럽게 잘 불렀는지 모르겠다.
노랫말이나 가락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냥 따라 부른 유행가였지만 나는 그 노래들이 그냥 좋았다. 어떤 노래는 두세 번만 들으면 금방 따라 부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봄날은 간다>를 제일 좋아했고 잘 불렀다. 그 노래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른 첫 유행가였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란 첫 구절을 부를 땐 아무렇지도 않다가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따라 울던…’ 이 대목을 부르고 나면 왠지 나도 모르게 슬픈 무엇이 느껴졌고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때 내가 알던 유행가는 <봄날은 간다>와 한참 뒤에 배운 <꿈꾸는 백마강>이었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로 시작되는 <꿈꾸는 백마강>도 좋았지만 내 정서로는 <봄날은 간다>가 더 좋았던 것 같다.
내 고향의 뒷산에는 봄이면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었다. 절골에는 산제비가 날아다녔고 성황당도 있었다. 우리 농장 둑에 올라서면 바로 낙동강이 보였다. 그런 저런 이유로 <봄날은 간다>를 더 좋아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나는 그때부터 유행가 잘 부르는 아이로 알려져 동네 어른들도 얼핏하면 유행가 한 곡조 부르라고 성화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동요를 더 많이 배웠지만 나는 동요보다는 유행가 쪽에 더 마음이 끌렸었다. 말하자면 못말리는 악동인 셈이었다.
부모들도 그 소문을 들었을 텐데도 꾸지람을 들은 적은 없었다. 아마 모르셨으리라. 엄한 교육을 시킨 아버지가 아셨더라면 아마도 나는 유행가의 ‘유’자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유행가는 어른의 노래이고 동요는 어린이의 노래이니 유행가를 부르지 못하게 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숨어서라도 불렀을 것이다. 그때부터 시인의 기질이 보였던 건 아니었을까.
내가 유행가를 계속 불렀던 것은 담임 선생님이 내가 부르는 유행가를 좋아했던 탓도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너는 시인이 될 거야’라고 하셨던 선생님이 어느날 내게 물으셨다. ‘너 유행가 잘 부른다면서? 내 앞에서 한 곡 불러 볼래?’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동요가 아닌 유행가를 아이들이 부르면 안 된다는 것도 모르고 잘 부른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야단은커녕 빙그레 웃으시면서 어디 한번 불러보라고 조르셨다. 그러나 선생님 앞에서는 어렵고 부끄러워 차마 부를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 봄소풍을 갔었는데 놀이시간에 선생님이 불쑥 나더러 유행가 한 곡 불러보라 하셨다.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봄날은 간다>를 구성지게 불렀다. 아이들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선생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 노래는 동요가 아니고 유행가지만 우리나라 여인들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노래라면서 참 잘 불렀다고 칭찬까지 해주셨다. 그때 선생님의 눈에 고이던 눈물을 보았다.
예쁜 선생님에게도 무슨 슬픈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생각하다 시집 간 내 언니를 떠올렸다. 그 언니가 잘 불렀던 노래가 <봄날은 간다>였다. 사랑하던 사람과 맺어지지 못하고 부모의 뜻대로 중매 결혼을 했던 그 언니는 특히 연분홍색을 좋아해서 친정에 올 때는 꼭 분홍색 옷을 입고 왔었다. 그 언니는 친정에 오면 잊지 않고 뒷동산에 있는 성황당과 암자를 찾았다. 마치 누구하고 약속이나 한 듯이 꼭 들렀다 가곤 했다. 내 언니는 성황당 돌탑에 돌 몇 개를 정성스레 올려놓고 무엇인가 빌었다.
성황당 고갯길을 넘으면 성불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암자로 가는 고갯길을 넘어갈 때 언니의 분홍치마가 바람에 휘날렸다. 앞서 가던 언니가 나지막이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봄바람에 휘날리던 연분홍 치마와, 언니의 눈물을 잊지 못한다. 가끔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를 부를 때면 그때가 생각나서 나도 조금 울 때도 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도, 내 언니도 왜 그 노래만 부르면 눈물이 고이고 목이 메었을까. 나는 오늘도 우리네 여인의 애환이 담긴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여인의 애환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불렀던 어린 시절의 <봄날은 간다>를 그리워한다. 고독한 이의 불타는 영혼 -시인들이 좋아하는 노랫말 2위,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 선 영 | 시인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처럼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킬리만자로의 표범>(작사:양인자, 작곡:김희갑, 노래:조용필) 중에서
시詩와 달리 가요가 끄는 매력이란 그것이 가사를 가진 음악이자 또한 동시에 곡조가 있는 문장이라는 것이다.
음악이 말하지 않는 시이고 시가 소리나지 않는 음악이라고 할 때, 음악과 시가 서로를 위해 조금씩 자신을 희생함으로 해서 생겨난 것이 가요라고 한다면 그럴싸한 말이 될까. 시가 ‘노리는’것이 언어의 무제한 확장이자 해방, 헤게모니 획득이라고 한다면 가요의 노랫말은 주어진 멜로디 안에서 어찌 보면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양 날개가 꺾인 새장 속 새의 지저귐에는 새장을 찢고 날아오르고자 하는 의지의 날카로운 발톱이란 이미 거세된 것이다. 새장 속 무력하지만 길들여진 새의 지저귐이 야생의 새의 울음보다, 시보다 행복할 수 있다. 달콤한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 시와 가요가, 시와 노랫말이 마치 연적戀敵처럼 서로 묘하게 끌리면서도 서로를 징그럽게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시인이 광대무변廣大無邊을 거침없이 내뱉는 래퍼(rapper)라고 할 때, 랩과 랩송으로서의 시와 가요의 근친관계도 맺어질 여지가 있지 않으랴.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자극하는 것 또한 고독하고 더러 장렬하기까지 한 래퍼로서의 시인의 자의식과 멀지 않다. 중간 중간에 독백 형식을 삽입한 노래의 편곡조차 그 극적인 효과를 한층 배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미 제목부터가 어떤 의미를 암시하는 상징인 데서 짐작되지만,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기존 가사 문법에서 벗어난 과감한 수사적 표현이다. 수사의 출발이 ‘낯설게 하기’에 다름아닐 때,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와 “굶어서 얼어죽는 눈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대비는 비천한 생에의 집착과 도리어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도달하고자 하는 생에의 초탈로서 극적인 상징성을 획득한다. 하이에나와 표범의 은유로써도 이토록 서정적일 수 있는 노래가 있던가.
높은 산정의 표범이고 싶어하는 ‘나’라는 페르소나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도저한 허무의식이다. 그 허무의식은 그가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가는’ 그의 존재의 기투성棄投性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질지언정 ‘빛나는 불꽃으로 타오르고자’ 하는 열망은 허무라는 무덤에서 솟아오른 커다란 봉분과도 같다. ‘나’라는 페르소나가 삶을 향한 비극적 정열의 소유자임을 증거하는 심상치 않은 씨니피앙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화가 고흐이다. 고흐가 ‘불행한 사나이’였던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비범한 정열의 소유자였던 까닭이다. 고흐는 또한 예술적 투혼의 메타포로서 <킬리만자로의 표범> 어느 구석엔가 예술가적 정열과 광기를 냄새맡을 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끊임없이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 고독한 이의 불타는 영혼’이란 다름아닌 예술가의 초상 아님에랴.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흥행 요인, 대중가요로서 반드시 지녀야 할 중요한 미덕을 용케도 놓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노래가 그 어느 연가 못지않은 절절한 사랑노래라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모두를 잃어도/사랑은 후회 않는 것/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라고 노래 불릴 때 거기에서 사랑의 맨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되었음을 어찌 실토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그러나, ‘굶어 얼어죽는’ 표범인 것만은 아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21세기가 나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야’라고 마치 <개그콘서트>에서처럼 제법 ‘깜찍한’ 대사를 내뱉는 그런 표범이기도 한 것이다.
가요가 시보다 직접적인 호소력을 갖는 것은 그것이 정서 또는 감정의 직정적 표출이며 직정적 언어로써 수행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언어가 그에 걸맞은 멜로디와 더불어 한층 돋보이기까지 한다면. 바람처럼 왔다가/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사랑이 외로운 건/운명을 걸기 때문이지/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이런 노랫말이 귓가에 들려온다면 어떻게 단번에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읊조려 보고 싶은, 부르짖어 보고 싶은 생각이 어찌 간절해지지 않겠는가!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그런 내밀한 욕망, 내밀한 …을 건드리는 노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견인해 가는 안개 -시인들이 좋아하는 노랫말 3위, <북한강에서> 성 귀 수 | 시인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릴 들으려 했소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북한강에서>(작사, 작곡, 노래: 정태춘) 중에서
나는 원래 노래를 들을 때 가사에 신경을 쓰는 타입이 아니다.
“노래란 음송吟誦된 시詩”라는 통설에 그리 공감하는 편도 아니지만, 어떤 노래가 내 귓바퀴로 흘러 들어와 감흥을 유발할 때, 그 가사의 내용보다 먼저 곡의 음과 박자가, 늦어봤자 노래하는 자의 음성이, 그 음색音色이 이미 내 감성을 호릴 대로 호려, 더 이상 그것에 실려오는 가사의 의미 따위는 아예 돌아볼 여유가 없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매우 좋아하는 노래는, 일단 좋아해 놓고 보면, 아주 형편없는 가사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좋아하는 노래의 아무리 기교적인 멜로디도 한 줄기 휘파람으로 너끈히 소화해낼 수 있으면서, 가사 한 소절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게 다반사인 것 또한 다 그런 사정 때문 아닌가 싶다.
그런 면에서, 정태춘이 부른 이 <북한강에서>는 내 뒤통수를 친 몇 안 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노래 역시 어두운 멜로디에 휘감겨 전해오는 비분절非分節적인 분위기에서 이미 독특한 매력이 감지되지만, 그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야말로 안개의 음역音域으로까지 내려간 듯, 신음처럼 깔려 흐르는 가사 그 자체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삶에 지친 한 사내의 소외된 실루엣이라도 떠오를 것 같은 이 노래의 가사는, 실은 무척 심오한 신화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즉, 1절에서 3절에 걸쳐, 물에 몸을 담근다는 테마의 진도進度에 비례해, 그 물의 흐름에 있어 하류가 아닌 상류로 거슬러 오른다는 테마가 중첩되는 가운데, 정화淨化와 재생再生의 코드가 만드는 신화적 자장磁場이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2절에 집중된 반복성과 그로 유발된 절묘한 운율감은 전체 자장에 없어서는 안 될 긴장의 축軸을 형성한다. 그러고 보면, ‘짙은 안개’ 속에서 나와 내가 ‘서로 부딪치며’ 뒤섞이는, 그래서 만물의 상응 교감(correspondance)마저 가능할 것 같은 2절의 카오스적 분위기야말로, 1절에서 3절로 의식意識을 건너가게 해주는 무의식의 통로인 셈이다. 그것은 시간의 퇴적으로 짓눌린 오늘을 어느새 ‘신선한’ 시원始原으로 되돌릴 수 있게 해주는 즉, ‘거슬러’ 올라가게 해주는 마법의 통로, 안개의 통로이다.
그래서일까, ‘안개가 가득 피어’났다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때까지, 시간처럼 마냥 하류로 흘러가 버리고 마는 강물의 흐름과는 어딘지 다른 느낌으로 안개가 움직인다고 느껴지는 것은? 실제 강물 위로 안개가 어찌 이동하는지는 차치且置하고, 오! 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저 ‘안개가, 안개가’ 나를 이끌어 저기 어디, 부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이 지친 사내를 견인牽引해 가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시공을 가로지르는 노래 -시인들이 좋아하는 노랫말 4위,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신 달 자 | 시인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작사:양희은, 작곡:이병우, 노래:양희은) 중에서
이 세상에 사랑만큼 유행가와 궁합이 잘 맞는 것도 드물 것이다. 더욱 사랑의 이별은 유행가의 탄생에서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이어져 온 불변의 주제이기도 하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도 사랑에 대한 이별의 노래다. 가사가 시와 맞먹는, 그래서 누구나 들으면 마음이 끌리는 그런 가사이고 누구나 들으면 자신의 슬픈 사랑의 주제곡처럼 들리는 노래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래 유행가를 부르면서 마치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착각을 가지는 노래들을 불러왔다. 그것이 유행가이고, 그것이 유행가에 투사된 우리들의 삶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행가는 아버지가 불렀던 노래를 아들이 부르고 어머니가 불렀던 노래를 딸이 부르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노래, 그것이 유행가이다. 시대가 급격한 변화를 일으켜도 어느 PC방 옆 노래방에서 <타향살이>와 <봄날은 간다〉가 들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는 이 글을 좀더 실감나게 쓰기 위해 전축에 양희은의 CD를 가동한다. 시간은 오후 5시가 지나고 있다. 겨울해가 곧 지려고 몸을 떠는 그런 시간을 택했다. 주변은 고요하고 마음은 공허했다. 좀 지나치게 청승맞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 쓸쓸함을 쓸쓸함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두어 번 그 노래에 잠수해 들어갔다. 가사가 정말 좋다. 좋다는 느낌은 누구에게나 공감이 갈 수 있는 노래이면서 마치 자신의 체험이 우러난 것이라고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좋다라는 긍정을 자연스럽게 노출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로 이 노래는 시작된다. 벌써 이별 냄새가 난다. ‘다시’라는 말과 ‘또’라는 반복의 의미가 지난 사랑에 대한 진한 상처와 그 상처를 에워싼 그리움을 읽게 된다. 자―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설령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하더라도 누구나 이별 끝에서는 이런 진부한 맹세를 하게 되는 일이다.
그러나 더 가슴을 울리는 구절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에서 가슴이 탁 막히고 만다. 그래 왜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을까, 사랑을 만들어 놓았다면 왜 어째서 영원하게는 못하게 인간을 미련하게 만들어 놓았을까.
미워하고 증오하고 왜 인간을 그렇게 저질로 만들어 놓았을까. 사랑은 자기보호대가 아니라 자기를 박살내는 폭풍이라고 생각하면서 입으로만 사랑이 위대하고 절대사랑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아끼고 희생을 겁내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늘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 그것이 우리들이다.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쓸쓸한 것인가. 그럼에도 사랑이 끝나면 생도 끝장나는 절벽으로 미끄러지고 만다. 세상의 모든 빛도 사라진다. 생명과 삶의 의욕이 죽는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비추던 모든 것들 그 빛을 잃어버려” 이 노래가사는 이렇게 사실적이다.
아니 이 노래가사는 이렇게 가슴을 적신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그렇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그런 사랑을 했으며 그런 이별을 한 사람들이다.
그렇다. 사랑은 이별이 있으므로 존재하는지 모른다. 이별이 존재하므로 사랑은 복수의 의미로 매력을 가지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일까. 유행가 가사는 이렇게 사람들의 아픈 가슴을 타고 내리며 세월을 따라온다.
가사가 참 좋다. 나도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생의 한계에서 만난 <한계령> -시인들이 좋아하는 노랫말 5위, <한계령> 이 경 림 | 시인
저 산은 네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네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한계령>(작사:하덕규, 작곡:하덕규, 노래:양희은) 중에서
나는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이 못된다. 유전적 소인이 있는지 보수적인 유교 가문에서 함부로 입 밖으로 소리내어 노래 부를 수 없었던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노래 못 부르는 사람이 되었다. 가문의 누구도 가수가 되었다거나 하다못해 어느 콩쿨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으니 아마도 전자 쪽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육 남매가 단칸방에서 아웅다웅 자란 기억 속에도 누구도 같이 실컷 노래 부르던 기억은 없는 걸 보면 그 믿음은 거의 사실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부르지는 못해도 듣는 쪽은 좋아하는 편인 내가 애절한 가요에 대한 추억이 왜 없겠는가? 특히 대중가요는 인간이 만든 어떤 예술보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어 생의 마디마다 그 시간을 함께 넘어온 가요들이 사람마다 다른 하고많은 사연들을 업고 어느날 문득 바알간 추억의 불을 켜들고 고개를 내밀곤 하는데…….
초등학교 몇 학년이었는지 경북 문경의 광산 사택에 살 때였다. 자고 새면 까아만 석탄길 위로 이마에 간데라 불을 단 광부들이 도시락을 달그락거리며 막장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첫새벽부터 공회당 앞 노무과에서 삑삑거리는 확성기를 통해 “에…… 안녕히 주무셨습니꺼? 은성광업소 가족여러분……” 하고 시작되는 방송은 애국가를 필두로 하여 무작위로 흘러 나왔다. 대부분이 그 당시 유행하던 가요들로 기억되는데 가장 많이 들었던 가요(?)인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하는 행진곡 풍의 살벌한 곡에서부터 <단장의 미아리 고개>, 송민도의 <나 하나의 사랑>, 명국환의 <아리조나 카우보이> 나애심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등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하는 다소 음험하고 애상적인 노래를 들으며 아홉 살 소녀였던 나는 직각을 배우고 구구단을 외웠다. 다른 무슨 고상한 명곡 같은 것이 있는지 상상도 못한 채 학교에서 배우는 동요와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가요가 음악의 전부인 줄 알고 자란 셈이다.
뒤에 서울로 유학 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비로소 그것보다는 훨씬 고차원의 음악이 있다는 걸 알았고, 한때는 클래식에 미쳐서 건방을 떨기도 했다. 그러나 고교 시절 후반기에 나타난 양희은, 송창식, 윤형주 등 통기타 그룹의 등장은 그런 시건방을 일시에 날려주기에 충분했다.특히 양희은의 등장은 살림 잘 하고 다소곳하고 남편이나 자식을 위하여 자기 생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도리요 영광이라고 수백 년 교육되어온 이 나라 여인들의 정체성을 외모부터 뒤집고 있었다.
미인의 기준이던 희고 야들야들한 피부 대신 까무잡잡한 얼굴에 약간 낮고 들린 듯한 코, 예쁘지 않은 눈, 비웃듯 조금 삐뚤어진 씨니컬한 입에서 터져나오는 도발적인 목소리는 ‘여자라는 굴레’ 밑에 수백 년 엎드려 있던 ‘인간’을 흔들어 깨운 것이다.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 아무렇게나 걸친 청바지와 티셔츠, 흰 고무신은 옷고름 물고 수줍어하며 남성 앞에 쩔쩔매던 이 나라 여인들의 수백 년 굴종의 역사로부터의 해방이었고 자유였다. <한계령>을 처음 들은 것은 80년대 중반쯤 어느 병실에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척박한 삶에 지쳐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심한 노이로제로 신경병동에 입원하고 있을 때였다. 몸과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피폐했고 생의 어떤 의욕도 용기도 없었다. 매일 죽음을 생각했고 실제로 그 문턱까지 간 적도 있었다.
어느날, 바깥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였던 라디오를 통해 들은 그녀의 노래는 그때의 상황과 맞물려 막장에서 서성거리던 나의 영혼을 흔들었다. ‘저 산은 내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노랫말 속에서 오지 마라고 말하는 산은 내가 적응하기에 벅찬 바깥세상이었고, 나는 그때 정말 뼈저리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싶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그 노래의 테이프를 구해 달라고 했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이상스레 그 노래는 들을 수 없었고 10여 년이 지난 90년대 중반 어느날 시인들의 모임에서 한 시인의 구성진 목소리를 통해 다시 듣게 되었다. 나는 음반 가게 몇 군데를 뒤져 그 음반을 사는 데 성공했고 지금도 아끼는 음반으로 서재 한쪽에 꽂혀 있다.
그래, 오늘도 라디오에선 끊임없이 누군가의 삶이 그 삶에 걸맞는 어떤 가수의 목소리를 통해 굽이치고 있으리라. 그리고 또 어떤 아픈 영혼이 거기 실려 출렁거리며 눈물 흘리기도 하리라.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그래, 지나간 시간들은 잊고 산이 떠밀어 내리는 저 아래 저자로 가자! 바람이 분다. 또 한 시절 용트림하며 살아보아야 할 것 아닌가? 기사제공 : 계간 시인세계 /기사입력: 2009/07/1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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