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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B. 브레히트

moon향 2015. 10. 16. 18:02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B.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

왕들이 손수 바윗덩어리들을 끌고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된 바빌론

그 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일으켜 세웠던가? 건축 노동자들은

황금빛 찬란한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완공된 날 밤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에는

개선문이 많기도 하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개선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에서도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린 날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이 그들의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데려가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왕은 자신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말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도

또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승리가 하나씩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십 년마다 한 명씩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그 비용은 누가 지불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 Chris Harman의『민중의 세계사』첫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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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주의 사관의 허구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1939년 작품이다. 인간은 두 가지 지위가 있다. 창조적인 소수자와 그를 뒷받침하는 민중. 역사는 대체로 이들의 조화로써 만들어간다. 하지만 세계의 역사서는 왕과 귀족, 장군과 소수 엘리트 집단을 중심으로 서술된 성공적 위인전이거나 그 실패담의 통사일 따름이다. 때로는 조화가 아니라 빼도 박도 못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였다. 큰 욕망의 뿌리가 굵은 나무를 세울 동안 잔가지나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잎사귀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가. 나무라 하지 않아도 좋단 말인가.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흑싸리 껍데기나 졸에 불과한 걸까.

 

 그렇다고 역사는 본디 민중의 것이라고 하지는 않겠다. 역사책의 부피를 고려하면 그들을 일일이 불러내어 기록하는 건 패스해도 좋다. 하지만 개개인의 이름이 없다고 해서 민중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은 옳지 않다. 지배자들은 ‘민중’이나 ‘노동자’란 단어의 생성조차 막아왔고 금기시했다. 그 언급만으로도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불순세력’ 취급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역사는 노동자들이 일을 조금씩 적게 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더 음식의 질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권력자나 사용자가 그저 쥐어준 은전이 아니었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곳곳의 민중들이 일어나 맞서 싸워 쟁취한 성과였다. 그래서 더 좋은 세상으로 향해 가는 것을 우리는 ‘진보’라고 한다.

 

 지금까지의 진보는 대체로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인간의 상식이 통하는, 민중을 깔보지 않는 권력이라면 싸움이 아닌 그들의 열린 감성과 이성에 기대어 세상이 좀 더 좋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피흘리지 않고도 좋아지는 세상을 기대한다. 적어도 ‘그 비용은 누가 지불했던가?’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을 이해하고 공손하게 답할 마음이 되어있는 권력이라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 많은 사실들’과 ‘그 많은 의문들’이 보태어지고 소문은 파다해지리라.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상상력이며, 그 상상력 속의 권력자와 창조적 소수자가 그때마다 조금 겸손해져서 잔가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기억해 주길 바랄 뿐이다. 정말 그것뿐이다.

 

 

권순진

 

 

4막님 블로그에서 가져왔는데, 독일어 원문이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