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 詩.....♡/떠 오 르 는 詩

영하의 날들, 페이드 아웃 - 권상진

moon향 2014. 6. 28. 17:35

 

  영하의 날들

 

                                  - 권

 

 

    이 골목은 열대의 모세혈관

    쪽문 깊숙한 곳까지 폭염을 나르던 적도의 시간들이

    출구를 헤매는 골방에서

    노인은 지팡이와 함께 싸늘하게 발견 되었다

 

    직립의 시간은 끝난 지 이미 오래인 듯

    폭염을 등에 진 채 골방에 ㄱ 자로 누운,

    저 경건한 자세가 되기까지 열대의 밤은

    블랙홀처럼 폭염을 빨아들였을 것이다

 

    극한의 외로움은 영하의 온도를 지녔다

    버려진 시선들만 싸락눈처럼 쌓이는 골목 어귀는

    외로움의 온도가 연일 기록적으로 갱신되고 있었다

    홑청 같은 그의 피부에 살얼음이 얼던 날

    맹렬하게 그의 체온을 데우던 열대의 밤은 결국

    조등인 양 달을 대문 밖에 내걸었다

 

    열대의 대륙에서 견뎌야 했던 영하의 날들이 저문다

    강변 공원에 삼삼오오 몰려든 사람들

    시린 영혼들을 위해 기꺼이 폭염을 견디던 그들은

    부의처럼 더운 심장을 강바닥에 내려놓고

    자정이 지나도록 돌아갈 줄 모른다

 

    빙하기 지층처럼 견고하던 얼굴에서

    겹겹의  표정들이 차례로 녹아내린다

    사람의 끝에서도 꽃이 피다니,

    래전 퇴적된 노인의 미소가 환하게 한 번 피었다 진다

 

    생의 아슬한 등고선에 기대 사는 지표 인간들

    빈방이 하나씩 늘어나면서부터

    여기까지가 사람의 경계라는 듯

    골목은 폭염을 다시 들이고

    인적 없던 골방마다 간간이 낯선 인기척들

    걱정스레 쪽문을 밀치고 있다

 

 

                                        - 제21회 전태일 문학상 당선작

 

  

   페이드 아웃

 

                                                        - 권상진

 

    경도와 위도가 모호해진 생의 어느 지점에서

    되도록 아주 느리게 그는

    한 방울 씩 사라져 가고 있다

    수액이 떨어지는 속도만큼 말갛게 변해가는 기억

    어떤 각도에서도 더 이상 세상은

    선명하게 수신되지 않는다

 

    무대 위로 방백의 대사들을 푸념처럼 흘리는

    슬픔들이 간간이 등장할 때마다

    괄호 속 지문들은 순간 혼란스럽다

    가슴께를 흔들어 대사를 재촉하는 손바닥에

    끊일 듯 이어지는 심장의 끝없는 말줄임표

    대본에 없는 그를 찬찬히 읽어가던 슬픔이

    감았던 눈을 뜨며 문을 나선다

 

    이 배역은 여기에서 끝을 내고 싶다

    결말만 남은 몇 페이지 대본을 뒤적여

    예언을 찾듯 다가올 시간들을 묵독해 본다

    막차처럼, 기억의 정거장 마다 멈춰서 떠난 것들을 기다리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그냥 두고

    주섬주섬 남은 기억들만 챙겨 떠나는 가설무대

    지워지는 빛의 입자들 뒤로 옴니버스 삶의 막이 내린다

 

   실감나는 배역이었다

 

 

    -『제21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 작품집』

 

 

 수상 소감

 

소외되고 가려진 세상의 뒷면을 들여다보는 시인이 되고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참 생각을 많이 하게 했던 지난 계절들이었습니다. 쓰고 싶은 시와 써야 하는 시의 경계에 서서 한 발짝도 움직여지지 않던 혼돈의 시간을 겪었습니다. 지난 여름, 습작 시들을 꺼내 읽으며 여기라면 내 시를 읽어주지 않을까 하며 기대 반, 체념 반으로 문을 두드린 곳이 전태일문학상이었는데 뜻밖의 당선 소식에 아, 이런 기분이구나 하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주신 전태일 재단과 경향신문사 그리고, 모자란 저에게 손 내밀어 주신 맹문재 선생님과 백무산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소외되고, 가려진 세상의 뒷면을 들여다보며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민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늘 제자리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가족들께 고마운 마음 보냅니다. 시라는 허영을 품고 살던 저에게 길을 터주신 이근식 선생님, 부족한 글에 늘 격려해주신 김종섭 선생님, 일면식도 없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따듯한 한마디로 저를 지켜주신 나호열 선생님, 모던포엠 전형철 발행인님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가족 같은 쪽방 식구들, 치열하게 시를 고민했던 비상 식구들과 경주문예대학 선생님들, 선후배님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늘 혼자인 것처럼 엄살을 부렸건만 수상소감에 이름들을 적다보니 저는 참 호사스런 글쓰기를 한 것 같습니다.

 

더 공부하여 내일은 참 좋은 글을 쓰겠습니다. 시의 변방에서 연고 없이 치열하게 습작하는 수많은 문우들에게 저의 당선이 한줄기 희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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