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바틀비
- 김소연
모두가 천만다행으로 불행해질 때까지 잘 살아보자
던 맹세가 흙마당에서 만개해요, 사월의 마지막 날은
한나절이 덤으로 주어진 괴상한 날이에요, 모두가 공
평무사하게 불행해질 때까지 어떻게든 날아보자던 나
비들이 날개를 접고 고요히 죽음을 기다리는 봄날이
예요, 저것들을 보세요. 금잔화며 양귀비며 데이지까
지 모두가, 아니오, 아니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루
를 견뎌요. 모두가 아름답게 불행해질 때까지 모두가
눈물겹게 불행해질 때까지, 온 세상 나비들은 꽃들의
필경사예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몰아쉬
는 한숨으로 겨우 봄바람이 일어요, 낮달이 허연 구
멍처럼 하늘에 걸려요. 구멍의 바깥이 오히려 다정해
요. 반나절이 덤으로 배달된 괴상한 날이예요. 모두
가 대동단결하여 불행해질 때까지 시들지 않겠다며
꽃잎들은 꽃자루를 꼭 붙든 채 조화처럼 냉정하구요,
모두가 완전무결하게 불행해질 때까지 지는 해는 어
금니를 꽉꽉 깨물어요.
<수학자의 아침> 에서
김소연(1967~ )은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마음사전》이라는 책의 날개에 적힌 시인의 연보에 따르면 김소연은 경주에서 목장집 큰딸로 태어나 사람 등보다는 소 등에 업혀서 자라났다고 한다. 천칭좌. B형. 시인은 어린 시절 경주를 떠나 서울 망원동에 정착하는데, 그 시기는 명확치 않다. 청소년기에 시를 만나고, 교사들과는 자주 불화하며 지냈다고 하는데, 시를 알았기 때문에 규범에 묶어두려는 교사에 저항했는지, 아니면 교사에 대한 환멸이 그를 시로 이끌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가톨릭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뒤 시를 쓰기 시작해서 1993년에 계간지 〈현대시사상〉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김소연의 시는 엘렌 식수가 말한 대로 “흰 잉크”로 씌어진 시다.
재기발랄한 시인 김소연이 “설거지통 앞 / 하얀 타일 위에다 / 밥그릇에 고인 물을 찍어 / 시 한 줄을 적어본다”(〈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라고 쓸 때 “여성 안에는 언제나 최소한 약간의 좋은 모유가 늘 남아 있다. 여성은 흰 잉크로 글을 쓴다.”(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라는 구절이 겹쳐진다. 소위 불의 연대라고 말하는 1980년대를 지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은 최승자에서 김행숙으로 이어지는 여성시의 흐름에서 그 중간쯤에 자리매김될 것이다. 그 사이에 김혜순, 황인숙, 나희덕, 김선우가 있을 터고, 그와 비슷한 언저리쯤에 진은영이나 이근화가 포진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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