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력 - 박서영
그러니 지구여, 이제 달을 삼켜주세요
허물어져버린 잔해 속에서 당신을 수습할 수 있도록
내 직업은 달에서 민박집을 하는 거지만
지구에 사는 당신과 몇 달을 살아보고 싶어서
농부의 밭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어요
내 몸의 파편을 주웠나요?
그게 세계의 달력이랍니다, 이중생활인 거죠
농부와 어부의 계절인거죠
오른쪽 가슴과 왼쪽 가슴처럼 우린 만나기 어렵죠
그러니 복숭아꽃이 개화할 때
꽃이 봉긋하게 솟아오를 때
어딘가에 메모해 둔 나비를 찾아 가야금을 연주하게 하세요
그러니 죽은 자의 음악만 들리는 항구에서요
농부의 딸년인데 바다에 가서 실종되었으니 감성돔, 볼락,
가자미와 해파리가 흔적일 지도 몰라요
내 산산조각을 주웠나요? 그게 고백한 순간 백고의 슬픔이 되어
등을 돌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빛을 내며 침몰하는 순간을 손에 들고
당신은 둥글게둥글게 짝짝, 손뼉만 치고 있으니
달력에 별무늬로 표시한 생일 앞에서
우리 다 같이 묵념!
- 월간 『시와 표현』 2015년 2월호 발표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6년 올해의 좋은 시 1000 [23]
달의 왈츠
당신을 사랑할 때 그 불안이 내겐 평화였다. 달빛 알레르기에 걸려 온몸이 아픈 평화였다. 당신과 싸울 때 그 싸움이 내겐 평화였다. 산산조각 나버린 심장. 달은 그 파편 중의 일부다. 오늘밤 달은 나를 만나러 오는 당신의 얼굴 같고. 마음을 열려고 애쓰는 사람 같고. 마음을 닫으려고 애쓰는 당신 같기도 해. 밥을 떠 넣는 당신의 입이 하품하는 것처럼 보인 날에는 키스와 하품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였지. 우리는 다른 계절로 이주한 토끼처럼 추웠지만 털가죽을 벗겨 서로의 몸을 덮어주진 않았다. 내가 울면 두 손을 가만히 무릎에 올려놓고 침묵하던 토끼.
당신이 화를 낼 때 그 목소리가 내겐 평화였다. 달빛은 꽃의 구덩이 속으로 쏟아진다. 꽃가루는 시간의 구덩이가 밀어 올리는 기억이다. 내 얼굴을 뒤덮고 있는 꽃가루. 그림자여, 조금만 더 멀리 떨어져서 따라와 줄래? 오늘은 달을 안고 빙글빙글 돌고 싶구나. 돌멩이 하나를 안고 춤추고 싶구나. 그림자도 없이.
-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4년 가을호 발표
박서영 시인(1968)
경남 고성 출생.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천년의시작, 2006)과 『좋은 구름』(실천문학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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