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H
잠 못 드는 몸을 웅크리고 연필 속으로 들어가 화석이 된
계절이 있다 흰 종이 위에 너를 펼쳐 적는다 굽이굽이 이어
진 선을 따라가다보면 내가 지워져서 숨기 좋은 골목이 나
타나고 먹통의 전화선을 목에 감고 죽은 낮달이 보인다 발
목 없는 그림자처럼 어디로도 이어지지 못한 입 속의 말들
깊은 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나무속에 박힌 연필심이다
가늘고 긴 광맥을 누군가는 보긴 볼 테지만 나는 아직 발설
하지 못한 밤을 내장하고 있어 쥐눈이콩처럼 까맣게 눈뜨
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하늘에 날아다니는 별로 오해하거
나 반딧불이를 잡겠다고 포충망을 들고 다가올지 모르지만
나는 부러진 연필심을 발견한다 밤의 밀어를 받아 적던
심야의 속기사를, 사각사각 종이 위를 혼자 걸어가던 등만
보이는 한 남자를 낡은 서랍 속에서 만난다 먼 곳의 외딴 방
에서 전깃줄을 갉아먹던 외로운 설치류처럼 침을 발라가며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던 어둡고 퀴퀴한 방에서 나는 한 마
리 애벌레처럼 나무속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 홍일표 시집 <밀서>
(누리집에서 구함)
<밀서>라는 어감 때문인지 홍일표의 시집을 펼치기 전부터 심장이 저렸다. 9H가 뭐지? 4B나 HB는 써봤지만, 저런 연필도 있었구나. 연필에서 H(Hard)는 단단한 정도를 알려주고, B(Black)는 진하고 부드러운 정도를 나타낸다고 한다. H와 B앞의 숫자가 클수록 단단하고 진하고 부드럽다. 9H는 고강도 연필이기에 돌이나 금속 위에까지도 글씨를 쓸 수 있다니 대단하다. 다이소에는 없을 것 같고, 문구 전문점에서 한번 찾아 보고 싶다.
1연만 읽어도 시 한 편 같아서 자꾸 읽었다. '지워져서 숨기 좋은 골목'은 알겠는데 '먹통의 전화선을 목에 감고 죽은 낮달'이 뭐지? 연필을 깎다가 떨어지는 둥그런 나무 조각을 말하는 건가? '발목 없는 그림자'나 '발설하지 못한 밤을 내장하고 있'다는 표현이 좋다. 나조차 몸을 웅크려 가늘고 긴 광맥에 들어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단단한 연필심이 부러져버렸다...... 혼자선 부러질 수 없을 텐데! 땅에 떨어져 밟혔거나 누군가의 대단한 악력에 의해 부러졌을 연필심 허리를 본 시인의 가슴은 더욱 저렸겠지.
9H 詩에는 '처럼'이 네 번 나온다. 그림자처럼, 쥐눈이콩처럼, 설치류처럼, 애벌레처럼! 처럼들이 처연하다. 왠지 '시인'으로 바꿔 읽고 싶은 낱말도 많다. '잠 못 드는 몸을 웅크리고 연필 속으로 들어가 화석이 된 계절(시인)', '지워져서 숨기 좋은 골목(시인)', '먹통의 전화선을 목에 감고 죽은 낮달(시인)이 보인다', '어디로 이어지지 못한 입속의 말들(시인들)', '나무속에 박힌 연필심(시인)', '하늘에 날아다니는 별(시인)', '부러진 연필심(시인)', '밤의 밀어를 받아 적던 심야의 속기사(시인)', 사각사각 종이 위를 혼자 걸어가던 등만 보이는 한 남자(시인)', 외딴 방에서 전깃줄을 갉아 먹던 외로운 설치류(시인)처럼 침을 발라가며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던'. 가장 근사한 건 '밤의 밀어를 받아 적던 심야의 속기사'다. '속'을 뺀 '기사(Knight)'도 낭만적인데......
시인은 어둡고 퀴퀴한 방에서 한 마리 애벌레처럼 스스로 선택한 고독 혹은 어쩔 수 없는 고립을 사랑해야만 하는 걸까? 이 시집에 반했다고 말하고 싶다. '몸 밖의 아이'란 시도 몇 번을 읽었다. 아이에 대한 시지만, 아버지처럼 다가왔다. 며칠 전에 현몽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눈사람 무덤'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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