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 詩.....♡/달 별 풀 꽃 새

겨울새 - 김기택

moon향 2015. 12. 3. 16:40

겨울새 - 김기택

 

새 한 마리 똑바로 서서 잠들어 있다

겨울 바람 찬 허리를 찌르며 지나가는 고압선 위

잠속에서도 깨어 있는 다리의 균형

차고 뻣뻣하게 굳어지기 전까지는

저 다리는 결코 눕는 법이 없지

종일 날갯짓에 밀려가던 푸른 공기는

퍼져나가 추위에 한껏 날을 세운 뒤

밤바람이 되어 고압선을 흔든다

새의 잠은 편안하게 흔들린다

나뭇가지 속에 잔잔하게 흐르던 수액의 떨림이

고압선을 잡은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불꽃이 끓는 고압은 날개와 날개 사이

균형을 이룬 중심에서 고요하고 맑은 잠이 된다

바람이 마음껏 드나드는 잠속에서 내려다보면

어둠과 바람은 울부짖는 한 마리 커다란 짐승일 뿐

그 위에서 하늘은 따뜻하고 환하고 넉넉하다

힘센 바람은 밤새도록 새를 흔들어대지만

푸른 공기는 어둠을 밀며 점점 커가고 있다

날개를 펴듯 끝없이 넓어지고 있다

 

 

- 김기택 시집『태아의 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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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 강계숙(문학평론가)

 

 

김기택은 미세하고 정밀한 투시력의 소유자이다. 대상의 감춰진 본성을 파고드는 그의 눈은 시가 다만 내면의 고백이나 미사여구의 잔치가 아니라 주밀한 관찰력에 바탕을 둔 지적 소산임을 말해준다. 감정적 치장이나 수식을 동반하지 않기에, 그의 언어를 따라 사물들은 직접적 현상으로 새롭게 깨어나고, 우리의 진부한 예상이나 느낌, 상식적 기대는 사물의 낯선 발견 앞에서 무력해진다.

 

그러나 물기 없이 적막한 어조와 달리, 김기택의 시는 차가운 열정으로 뒤척인다. 존재하는 것들의 두꺼운 꺼풀을 벗겨 내는 집요함과, 무의미한 움직임에서 격렬한 운동성과 생명력을 찾아내는 타고난 직관은 지루하게 포복하는 세계에 고요하지만 역동적인 힘을 부여한다. 시집 [태아의 잠]은 김기택이라는 시인의 등장을 알린 최초의 계기였지만, 현미경으로 보는 듯한 치밀한 관찰과 건조한 묘사가 어떻게 시적인 것에 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새로운 스타일의 출현이기도 하였다.

 

‘겨울새’는 시인 특유의 투시적 상상력이 소리 없이 물결치는 섬세한 정경의 창조로 나아간 시이다. 찬바람을 견디며 한 줄 고압선에 내려앉은 새는 목숨을 건 위태로운 직립의 존재이다. 허공을 버티는 가냘픈 다리의 긴장과 집중은 추락의 전조처럼 느껴져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새의 잠은 평온하고, 공기의 흐름과 더불어 부드럽게 흔들린다. 그 발아래서 고압선은 더 이상 고압선이 아니다. 스스로 비운 잠의 여백과 가볍게 트인 공간의 여운에 전이된 듯, 날카로운 물질성을 상실한 고압선은 수액 가득한 나뭇가지가 된다. 새가 머문 그곳은 지금 무한한 정지이면서 영원한 흔들림이고, 고독의 거처이면서 공생의 균형이며, 이제 막 살아나 환해지는 자연의 출발점이다. 그렇기에 “불꽃이 끓는 고압”은 “고요하고 맑은 잠”으로 변해, 새의 날개를 타고 밤의 어둠을 벗어나 따뜻하고 넉넉한 하늘에 닿는다. 거기엔 푸르른 자연의 기운이 가득하다. 팽팽하게 당겨진 몸의 무게를, 그 둔중한 육체의 중력을 거둬내며, 겨울새는 이렇게 시인을 통해 끝없는 고요의 진원지로, 혼곤한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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