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백양사에서 - 나종영
어느 겨울날에
나는 한 마리 버들치이었거나
얼음장 밑에서 지느러미를 흔드는
눈 맑은 빙어(氷魚)라도 되겠지
붉은 잎 다 떨어진 단풍나무 아래에서
게송을 외우는 나무물고기가 되어 있겠지
찬바람 불고 느티나무 잎사귀 다 지고 난 후
그리운 사람이 오지 않는다 해도
사랑 그 아픈 이름이 멀어진다 해도
물 위에 내리는 눈송이에 손 흔드는 물풀이 되겠지
한 마리 버들치도 빙어의 지느러미도 없는 저녁
차마 눕지 못한 풀이 되어
그대에게 가는 풍경(風磬) 소리가 되네
산새가 물고 가는 허공의 풍경 소리,
그 너머 스러지는 은빛 물비늘이 되겠네
어느 겨울날 나는 한 마리 버들치이었거나
마른나무 가지에서 기도하는 물고기가 되리
눈 내리는 겨울 백양사
징검다리 건너 길 떠나가는 나그네의 발자국이 되리
그대 등 뒤에 비추는 한 올 햇살이 되리
—《문학들》2014년 겨울호
나종영 / 1954년 광주 출생. 1981년 창작과비평사 13인 신작시집『우리들의 그리움은』으로 등단. 시집『끝끝내 너는』『나는 상처를 사랑했네』등. 〈시와 경제〉,〈5월시〉동인. 현재 《문학들》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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