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들에 빈 들을 데려오면
- 이제니
빈 들에 빈 들을 데려오면
서서히 겹치면서 사라지는 어제의 빈 들
어제의 빈 들에는 사라진 꽃들이 있고
사라진 꽃들에는 사라진 잎들이 있고
사라진 잎들 속에는
주름들
구름들
먼지들
숨어 있는 벌레들
벌레는 잎으로부터 내려와
찬 바닥에 여리고 어린 배를 끌면서 기어가고
사라진 벌레들 위로는 사라진 눈 코 입
사라진 얼굴들이 떠오르면 따라오는 기억들
막차가 오듯 마차가 도착한다
박자가 끼어들고 마침표의 망설임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인데
색으로 말하자면 엷은 살구의 살갗빛
목소리는 말한다
차가운 배에 손을 대어본 것처럼
차가운 비애에 얼굴을 적셔본 것처럼
시간은 다시 돌아올 거라고
결국 후렴구는 아름다워질 거라고
사각으로 다시 펼쳐 일정한 속도를 지켜내면서
선량한 발음들이 줄지어 음표 위를 흐르고 있기 때문에
망각이 망각을 불러온다고 쓰면
온전한 망각은 이제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이중의 망각 속을 오갈 수 있을 뿐으로
지옥도와 극락조 사이를 오가듯이
벌레는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온 생애를 다해 자신의 몸으로 밀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보이지 않아도 남겨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꽃들 잎들
나무들 구름들 바람들 길고 희미한 흔적들로 남기면서
빠른 노래와 느린 노래를 오가듯이
하나의 삼각형 속에는 네 개의 삼각형이 들어있습니다
살구와 살구와 살구와 살구가 들어있습니다
다시 박자가 끼어들고
음표와 음표 사이는 둥근 삼각형으로 흐르고
목소리와 목소리는 여리고 어린 발음들로 채워지고
말하지 못했던 여운으로 여음으로
꿈결인 듯 꿈결인 듯 마차는 달리고
다시 한 번 박자가 끼어들고
흰 빛에 흰 빛을 더하면 더욱더 환해지는 빛
빈 들에 빈 들을 데려오면
서서히 사라지면서 나아가는 오늘의 빈 들
- 시 전문지《포에트리》2017년 창간호
초혼2009 - 우창헌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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