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말이 골목 / 최일걸
암초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따개비모양
봉제공장들이 저를 단단하게 오므린 채 거꾸로 서서
수천대의 재봉틀로 하루를 돌린다
자꾸 달아나는 시간을 노루발로 고정하고
아찔한 곡선박기로 내일을 꿈꿔보지만
어김없이 되돌아박기가 여공들을 꿰매버린다
햇빛 한 점 안 들어오는 지하 공장은 먼지로 포화상태,
재단사의 가위질은 쉼 없이 여공들의 꽁무니를 베어내지만
그래도 김밥말이 골목은 그녀들의 꼬리뼈에 매달려 있다
재단사의 줄자가 정오를 휘감으면
봉제공장 거리의 봉합선이 뜯기고
여공들이 한꺼번에 밥알처럼 쏟아져 나와
한 땀 한 땀 김밥말이 골목으로 향한다
양은냄비보다 먼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여공들은
수다를 첨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지만
김밥말이로 돌돌 말아 한통속이 된다
라면 다발과 함께 풀어지는 그녀들의 일상이
식당 아줌마의 손길을 거쳐 김밥에 뒤섞인다
식당 아줌마가 손으로 김밥을 꾹꾹 누를 즈음이면
그녀들은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다
접시에 담긴 김밥을 묵묵히 바라보며
그녀들은 옆구리가 터진 김밥처럼
네팔로 필리핀으로 소말리아로 연변으로
38선 이북으로 삐져나간다
굶주린 가족들을 생각하면 일용할 양식도
독약처럼 치명적이어서
김밥을 목구멍에 넘길 수 없다
목구멍이란 얼마나 질기고 처절한 골목인가
과연 김밥 한 줄로 그 골목을 통과해도 되는 걸까
그녀들은 막막하고 까마득하다.
수도꼭지 장례식
그 가족을 세상과 연결지어주는 건 수도꼭지였다
지하 셋방, 전기와 가스와 전화는 끊긴 지 오래,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쉼 없이 쏟아지는 수돗물뿐,
만약에 집주인이 공사를 강행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좀 더 오래 수도꼭지를 통해
세상을 엿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경찰이 눅눅한 어둠을 걷어내자
전깃줄로 서로를 꽁꽁 묶은 일가족 시신이 드러났다
죽어서도 헤어지지 말자
30대 가장과 어린 아들딸은
전깃줄로 허리를 질끈 묶으며 그렇게 다짐했지만
아들딸의 죽음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을 엄마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대체 그들은 수돗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며칠이나 버티다가 위험수위를 넘은 걸까
그들의 머리맡에 나뒹구는 종이컵 세 개,
그 안에 담겨 있던 최후의 만찬은 바닥을 드러냈는데
카메라로 일가족을 채집했다
처음 찍어보는 가족사진,
그래도 수돗물은 콸콸 쏟아져 나와
마지막 가는 길에 단비로 내렸을 것이다
집주인이 투덜거리며 수도꼭지를 잠그자
수도꼭지를 들락날락하던 일가족은 이내 잠잠해지고
장례식은 막을 내렸다
지나치게 몸 낮추고 살아온 탓에
한 번도 슬픔을 꺼내 말려본 적 없는 그들은
노트 5장 분량의 유서 행간을 용케 빠져나와
신문 하단에 일단기사로 말라붙었다
<두레문학 > 2008. 8호
최일걸 시인
1995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1997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06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2006 <전남일보> 신춘문예 희곡 가작 입선
2008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8 춘천인형극제 대본공모 가작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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