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詩 詩.....♡/떠 오 르 는 詩

식민지의 국어시간 - 문병란

moon향 2018. 10. 9. 23:48

식민지의 국어시간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시간이여.

 

- 시집 땅의 연가(창비, 1981)

 

 

 

 

 

-   권순진 , 詩하늘 통신에서 펌(http://blog.daum.net/act4ksj/13770717)
 

 몰라도 상관없지만 시에서 ‘히노마루’는 일장기를 말하고 ‘기타나이’는 더러운 놈이라는 뜻의 일본어다. 일본에 의해 빼앗긴 우리말과 글을 되찾아 채 가꾸고 다듬기도 전에 다시 일본어를 익히고 영어를 배워야 했던 현실이 시인은 부끄럽고 서글프다. 출세하려면 국어보다 외국어를 더 잘 알아야하는 풍토가 시인으로서는 못마땅하다. 이 시가 발표된 지도 40년이 훌쩍 넘었다. 그렇지만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말 가꾸기에 대해 말하면 오히려 글로벌 환경에 쫒아가지 못해 뒤떨어진 사람의 넋두리로 받아들인다. 이런저런 한글날 기념행사야 ‘놀이’처럼 열리겠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겨레의 바탕인 우리말의 힘을 깨닫기보다는 여전히 외국어를 더 중시하는 생각의 똬리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점방이나 아파트, 심지어 공공시설의 이름도 외국어로 지어야 멋있다고 여긴다. 아파트 이름은 죄다 외국어이거나 외래어 풍으로 꼬부린 우리말이고, 멀쩡한 이름을 바꾸는 것만으로 아파트 가치가 상승하리라 믿고 실제 그렇게 했다. 그래서 아파트는 온통 ‘빌’ 아니면 ‘뷰’고 ‘타운’이니 ‘파크’, ‘타워’와 ‘캐슬’이 되었다. 요즘은 이것도 한물가서 불어에다 라틴어까지 동원되고 있다. 말과 글의 우리 것은 여전히 홀대받으며 국가기관이 오히려 앞장서고 있는 형국이다. 행정용어에는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는 한자조어가 수두룩하게 남아있고 새로 만들어지는 용어들은 죄다 어려운 영어다. 글로벌도 좋고 국제화도 이해하지만 덮어놓고 이러는 거는 아니라 본다. 지나친 외래어 남용은 국가 정체성과도 무관치 않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구호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이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아무리 미국에 기대고 눈치 보는 처지로서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무언가. 이제 더는 시인이 겪은 ‘슬픈 국어시간’의 되풀이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 여담으로 과거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자면, 2003년 강원국 청화대 연설 비서관을 처음 만난 노 대통령은 "짧고 간결하게 쓰게, 군더더기야 말로 최대 적이네" "평소에 사용하는 말을 쓰는 것이 좋네, 영토보다는 땅 식사보다는 밥 치하보다는 칭찬이 낮지 않을까?" "단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는 주제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 글은 써서는 안 되는 글이네" 임기5년 동안 글쓰기 특강은 내내 이어졌다. 연설문이 단박에 통과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토록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조차 노무현의 글쓰기 철학에 글쓰기의 모든 정수가 담겨져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등 말로써 국민의 입에 가장 오르내리고 자질 논란까지 들어야 했던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 살아온 과정이 우아하게 말하면서 일하는 환경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학을 안 나왔고 살아온 환경이 비주류였기 때문에 주류언어를 익숙하게 쓰는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이다. 물론 그 자신도 주류언어 속으로 들어가려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정리해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게 최고의 말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대통령의 말이 어디 따로 있는 것처럼 거기에 안 들어온다고 공격을 해대니까 견딜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노무현의 고뇌에서도 우리나라의 지도층과 지식인들이 우리말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말을 대접한다는 게 기껏 이런 식이다. 홈쇼핑과 편의점에서는 가격을 말할 때 “3만원이세요.” 커피숍에서는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이런 몰상식한 높임말이라니. 채팅 축약어는 더욱 가관이다.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 “여병추”(여기 병신 하나 추가요)와 같은 기괴한 낱말들이 인터넷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줄임말도 정도껏 해야지 이런 지경이면 한글파괴에 다름 아니다. 중국은 조만간 대학입시에서 영어과목을 없애거나 점수 비중을 대폭 축소할 예정이라고 한다. 중국 교육 당국의 이러한 방침은 자국민들이 영어에 경도되면서 모국어인 중국어를 경시하는 풍조를 바꿔보려는 의도라고 한다.


본디 중국인의 모국어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대단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 이하의 학생들에게 영어 교육을 금지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라 한다. 유아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사립 초등학교에서 영어몰입교육까지 시키는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유은혜 교육부장관은 기존의 방침과 소신에서 후퇴하여 유치원 방과 후 영어 허용과 함께 초등 저학년 영어수업도 가능하도록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임명과정에서 호되게 당해서인지 주류의 압력에 밀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핀란드를 위시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외국어는 말할 것도 없고 취학 전 문자 교육은 엄격히 금하고 있다. 문자교육은 자유로운 정서발달과 집중력을 해치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태어나자마자 무한경쟁사회의 욕구 때문에 영어를 가르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지 싶다.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의 유아에서부터 경쟁을 부추기는 이 기이한 욕망은 아이 낳기를 꺼려하는 심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영어를 못하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분위기의 조장은 한글의 자긍심과 함께 자칫 민족의 씨를 말릴 수도 있다. 유 장관은 ‘놀이’처럼 영어를 배우게 한다지만 그 놀이가 사람의 정체성을 왜곡시킬 염려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행동하며, 이 사고와 행동이 축적되어 문화를 형성한다. 오래 전 ‘차라리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더라면 영어 하나는 건졌을 텐데’란 망언을 한 인사가 생각난다. ‘우리 겨레에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시인이 살아계신다 해도 여전히 부끄럽고 서글픈 현실이다. - 권순진 블로그에서

 

'詩 詩 詩.....♡ > 떠 오 르 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 박세랑  (0) 2018.09.25
해질녘 - 채호기  (0) 2018.07.02
고향 열차 - 윤중목  (0) 2018.05.10
9H - 홍일표  (0) 2018.04.27
기도1 - 서정주  (0) 2018.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