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구리를 긁다 - 임솔아
(2013년 중앙일보 신인상 당선작)
빈대가 옮았다 까마귀 몇 마리가 쥐 한 마리를 사이좋게 찢어먹는 걸 구경하다가 아무 일 없는 길거리에 아무 일 없이 앉아 있다가 성스러운 강물에 두 손을 적시다가 모를 일이지만 풍경의 어디선가
빈대가 옮았다 빈대는 안 보이고 빈대는 안 들리고 빈대는 안 병들고 빈대는 오직 물고 물어서 없애려 할수록 물어뜯어서 남몰래 옆구리를 긁으며 나는 빈대가 사는 커다란 빈대가 되어간다
비탈길을 마구 굴러가는 수박처럼 나는 내 몸이 무서워지고 굴러가는 것도 멈출 것도 무서워지고
공중에 가만히 멈춰 있는 새처럼 그 새가 필사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처럼 제자리인 것 같은 풍경이 실은 온 힘을 다해 부서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래들이 있다
빈대는 나 대신 나를 물어 살고 빈대는 나는 물어 나 대신 내 몸을 발견한다 빈대가 옳았다 풍경을 구경하다가
그림자와 살았다
바람이 없어도 화분의 그림자는 흔들린다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를 만날 수 있다 화분처럼 나는 있다 내 그림자로 인해 나는 나를 구경할 수 있다 그물처럼 서로의 그림자가 겹쳐질 때 그곳은 우리의 집이 된다 아무나 밟고 지나갔으나 아무리 밟아도 무사해지는 집이 느리게 방바닥에서 움직인다
구름 그림자가 방안으로 들어오면 창밖의 먼 곳에서 바람이 분다 구름 그림자는 발끝부터 나를 지나간다 날벌레 한 마리가 구름 그림자를 드나들고 가만히 있어도 먼 것들이 나를 뒤덮는다
오랫동안 화분처럼 나는 있다
그림자는 목숨보다 목숨 같고 나는 아무것에나 그림자를 나눠준다
아무와 나는 겹쳐 살고 아무도 나를 만진 적은 없다
어두운 면
발소리가 조여온다 발소리가 팽팽하게 조여온다
가로수의 조용함이 뾰족해진다 가로수의 그림자가 날카로워진다 나는 길을 돌아가기 시작한다
주먹을 쥔 채로 모퉁이에서 뒤돌아선다
누구야 왜 따라와 밤길이 걱정이 되었어 집에 간다더니 어디를 몰래 가는 거야? 나를 빤히 쳐다본다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안 보이는 눈이 안 보이는 곳에서
우리는 잠시 공원에 앉아 미끄럼틀을 바라본다 미끄럼틀의 밝은 면은 비어 있다 미끄럼틀의 어두운 면은 숨어 있다 어두운 면이 되지 않으려면 들킬 것이 없을 때까지 더 어두워야 할까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이 발끝에 엉겨붙는다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이 덥썩 자라난다 내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데 센서등이 켜지고 꺼진다 고양이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임솔아, 201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인터뷰 ]
황경순 - 안녕하세요? 이렇게 젊은 시인을 얻게 되어 우리 문단의 앞날이 훤해지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예술 분야가 있고, 글도 여러 장르가 있는데 특별히 시를 쓰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임솔아 - 특별히 시를 쓴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시도 쓰지만 소설도 쓰고, 산문 쓰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다만, 시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존재감 때문이었어요. 청소년 때였는데, 글을 쓸 때에만 존재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걸 느끼고 싶어서 계속 일기를 썼고, 자연스럽게 소설도 쓰게 되고 시도 쓰게 되었지요.
황경순 - 시산맥에 실린 글을 읽으셨거나 시산맥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있다면 시산맥에 대한 느낌은 어떠셨나요? 현재 우리 문단에는 여러 잡지가 있고, 그 중에서 시산맥은 특히 전국적인 인맥을 가지고 있고 회원들의 참여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잡지라고 자부합니다. 현재 우리 문단의 문제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시산맥과 문단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겠어요?
임솔아 - 시산맥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어요. 문예지나 시집을 두루 읽어보지는 못했어요. 문단의 문제점은 폐쇄적이고 의존적인 제도의 구조에 있다고 생각해요. 등단에서부터 청탁, 책 발간과 평가까지 대체적으로 제도의 선택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글 쓰는 사람들이 스스로 제도를 넘나들어 제도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지는, 열려 있는 새로운 문화를 함께 만들 수 있기를 바라요.
황경순 - 당선작 「옆구리를 긁다」에 얽힌 에피소드나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임솔아 - 빈대 옮은 적이 있어요. 어디서 옮았는지 궁금했는데, 어디서 옮은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물린 곳을 세어봤는데, 백 군데도 넘었어요. 이태리타월로 몸을 닦고 빨래를 해도 안 없어졌어요. 하루는 빈대와 함께 숙박업소에 들어가는데, 경비가 저를 잡았어요. 저만 짐 검사를 했어요. 제 몰골이 추레해서, 저를 잡상인이나 거지로 오해한 것 같아요. 돈이 있다는 걸 증명한 후에야 들어갈 수 있었어요. 방에 들어와서 옆구리를 긁다가, 커다란 빈대 취급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빈대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제가 빈대 같다는 생각을 했고요.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이 세상에게, 빈대 붙어 빌어먹고 살아 왔다는 생각이요. 또, 빈대처럼 살 수밖에 없는 목숨들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요. 막상 빈대를 없애는 일에 성공했을 때에는, 참 시원하면서도 미안했어요. 보이지도 않는데 함께 했다고 정이 들었나 봐요. 몇 년간 빈대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 꼭 쓰고 싶었어요.
인터뷰 • 황경순 2006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으로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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