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 무렵 - 안도현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애와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왔습니다
그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애의 어린 숨소리를
열몇살 열몇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인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중에서,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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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무렵,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이라니. 아~~~안도현 시인님!^^
로맨스 몇 개는 벽장 속에 숨겨두고 가을마다 꺼내 '낭만 시향'으로 불태워야 할 텐데...... 없넹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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