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시집 『강변북로』서평
잘 빚은 언어 항아리에 담긴 시퍼런 시혼(詩魂) - 이경철
강인한 시인의 아홉 번째 신작 시집 『강변북로』를 읽으며 우선 ‘참 예술적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시가 ‘언어예술 작품’임을 실감했다. 시인이 뭔가를 애써 말하고 보여주지 않고 텍스트 자체가 뭔가를 내게 걸어오는, 그야말로 감상용 예술. 삶과 사회의 의미가 끈적끈적 묻어나지 않고 박하 향같이 가슴 가득 화하게 번져오는 언어와 이미지들에서 시인이 참 개결하면서도 치열하게 시를 순수한 예술로 끌어올리고 있음을 알았다.
매미 울음소리
붉고 뜨거운 그물을 짠다
먼 하늘로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
저 푸른 강에서 첨벙거리며
물고기들은
성좌를 입에 물고 여기저기 뛰어오르는데
자꾸만 눈이 감긴다
내가 엎질러버린 기억의 어디쯤
흐르다 멈춘 것은
심장에 깊숙이 박힌
미늘,
그 분홍빛 입술이었다.
바로 앞에 나온 시집 『입술』의 표제작 전문이다. 이 시를 감상하며 나는 ‘미늘’에 꿰인 듯했다. 온몸의 감각으로 포착해 절차탁마한 이미지와 전 생애의 기억을 한 순간에 낚아채는 시혼의 미늘에. 김종삼 시인의 좋은 시에서 만나는 ‘덧없는 아름다움’이 순수 예술작품으로서의 시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울컥, 우주적 그리움의 한 생애를 꿰는 시도 있구나 하며 감탄했었다.
시집 『입술』에 실려 있는 시들의 경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청년의 가슴에서 끌어낸 영원한 에로티시즘의 미학이라 할 만하다. 거기에는 탐미주의적 관능미를 추구하는 팽팽한 감성적 긴장미가 있고, 완벽한 예술성을 추구하는 진지하고 견고한 언어적 형상화의 세계가 있다. 현실에 대한 간섭이나 비판을 보여주는 시들에서도 심미적 안목으로 접근하는 장인다운 기질이 엿보여서 오늘의 우리 시가 나아가야 활 하나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10년도에 시집 『입술』에 한국시인협회상을 주며 밝힌 심사평 중 일부이다. 문예지나 출판사, 언론사의 연분이나 잇속, 시세에 밝은 안목이 아니라 순수한 시인들이 시 자체의 안목으로 엄선하고 밝혔기 때문인가. “청년의 가슴”, “감성적 긴장미”, “예술성”, “언어적 형상화”, “심미적 안목”, “장인다운 기질” 등 강인한 시의 특장들을 어느 긴 평문보다 그대로 잘 적시해내고 있는 평이다.
이 심사평은 특히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40년 넘게 창작활동을 해 온 60대 후반 시인이 쓴 작품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싱싱하고 선명하며 격정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청년의 가슴”에 주목했다. 수상소감에서 “시에 입문할 때의 초심으로 목숨을 걸고 쓴다.”고 밝힌 시인의 결연한 초심이 연륜에 젖은, 상투화된 시가 아니라 영원한 청년 가슴의 시를 낳고 있는 것이다.
헬리콥터가 날아온다,
한 대, 두 대.
두 줄 가득 털 난 굉음을
풀어놓는다.
시끄러운 부분만 가위로
동그랗게 오려낸다.
물 위에 띄운다.
청둥오리들이 부지런히 쫓아와
동그란 하늘의 털 난 꽁무닐
콕콕 쪼아댄다.
버들개지 눈이 찔끔
놀라서 바라보는
저쪽,
안 보이는 별들이 좌르륵 쏟아져 내리는 저쪽
물살에 은비늘이 튄다.
이번 시집 『강변북로』에 실린 시 「봄날」의 전문이다. ‘물’, ‘청둥오리’, ‘버들개지’, ‘물살에 은비늘’로 보아 양재천 같은 강가에 앉아 오는 봄의 정경(情景)을 담은 시이다. 거기에 헬리콥터 한 대, 두 대가 콤마같이 짧게짧게 끊어지는 굉음으로 날아들며 오는 봄을 아연 부산하고 활기차게 한다. 언어로 잘 빚은 항아리 같은 형태와 정(情)보다는 경(景)이 도드라진 이 시에 와서 나는 시가 예술작품임을 실감하며 무릎을 친 것이다.
간장 항아리 위에
둥근 하늘이 내려오고
매지구름 한 장
떴다가
지나가듯이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가끔은 내 생각도 하는지
늦은 봄날 저녁
머언 그대의 집 유리창에
슬며시 얹히는 놀빛
모닥불로 피었다가
스러지듯이.
앞 시집 『입술』에 실린 「늦은 봄날」전문이다. 같은 ‘봄날’을 그렸으면서도 이 시에서 풍경은 지나가듯 스러지듯 흘러버리고 시인의 정을 붙들어매고 있어 자칫 그렇고 그런 감상(感傷)에 빠진 감도 들었는데. 이번 시집에서도 “철도 침목 또박또박 받아 읽으며”처럼 절차탁마된 언어와 이미지가 돋보이는데도 “기차표 고무신을 신고/ 달리다 엎너진 언덕길 기다란 줄이 끊어져서……” (이상 「열두 살의 구름」부분)에서 보이듯 인연의 그 질기고 기다란 정의 줄을 끊지 못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는데…….
「봄날」에 와서는 그 정을 콤마로 확 끊어 ‘저쪽’에 “안 보이게” 치워두고 풍경만 “콕콕 쪼아댄다.” 봄날 오래도록 강변에 앉아 쪼아대는 그 풍경. 풍경마다에서는 입안에서 바글바글 부서지는 박하 향이 난다. 풍경이 아니라 ‘바가, 바가’ 혹은 ‘콕, 콕, 콕, 콕’ 헬리콥터 나는 소리에 연계된 공감각적 이미지들이 되레 하늘과 청둥오리와 버들개지와 물살 은비늘이 어우러진 전혀 새롭고 상큼한 봄을 연출하고 있는 이미지의 풍경 자체가 예술이다.
그러면서도 “놀라서 바라보는/ 저쪽,”이라며 긴장되게 이미지의 저쪽, 배면(背面)을 환기시키고 있다. 정의 끈을 차마 영영 놓아버리지는 않고 은비늘 튀는 물살에서 “별들이 좌르르 쏟아져 내리는” 풍경의 저쪽을 보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저쪽’은 무엇인가. 설명하면 더 구차스런 에스프리이며 시혼(詩魂)이며, 외로운 것들의 원초적 그리움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런 ‘저쪽’을 끊어버리지 않고 감추어두어 좋은 시들은 예술을 위한 덧없는 순수시가 아니라 순수 예술이면서 삶과 혼을 위한 시가 되는 것이리라.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
강물을 일으켜 붓을 세운
저 달의 운필은 한 생을 적시고도 남으리.
이따금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면
검은 강은 입을 다물고 흘렀다.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았는데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
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
그 더러운 허공을 아는지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떼들.
나는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 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었다.
이번 시집 표제작인 「강변북로」전문이다. 나도 한때 서울에서의 퇴근길에 이 강변북로에 그대로 이어지는 자유로를 수없이 달렸다. 달이 지나가고 정면으로 지는 꽃노을에 눈이 부시고 가로등 불빛이 금빛으로 피어오르고 철책 촘촘히 박힌 강변 철조망에 날게 찢기듯 나는 새 떼들의 강변 풍경을 참 많이도 봐왔다.
이 시도 그런 강변 풍경을 차례로 그리고 있다. 아니, 풍경이 아니라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며 그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가슴속에 담아와 다시 베란다 의자에 앉아 바라보며 곰곰 삭인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시 속의 풍경. 이미지는 이래야 한다는 듯 모범적으로 삭인 이미지들이 풍경이 허투루 전할 수 없는 시대와 삶과 서정의 심층부까지 울리고 있다. “한 생을 적시고도 남을” 그 절차탁마의 운필(運筆)과 시혼(詩魂)으로.
4연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나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에서는 이 강을 건너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독재정권 시대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연의 “그 더러운 허공”에서 그 역사의 사실은 시적 진실에 내포되고 만다.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 떼들”은 인간의 독재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언어와 이미지, 시와 시인으로도 읽을 수 있으려니.
하여 잘 빚은 언어의 항아리로서 예술품이면서도 삶과 사회와 역사까지 담아내며 2연 같은 서정적 절창, 일필휘지의 포에지를 낳게 된다. 이 부분 다시 한 번 감상해보시라. 어디 꽃노을 눈부셔 문 것 떨구고 가는 것이 새뿐이겠는가. 저 강도 꽃도 구름도 우리네도 우주도 그리움도 모두 그럴 것 아닌가. 바슐라르가 말한 전 우주의 비전과 하나의 혼의 비밀, 그리고 여러 대상의 비밀을 동시에 드러내는 순간화 된 형이상학으로서의 포에지의 구체(具體)가 이 서정적 절창에서 잡힐 듯하지 않은가.
“시는 언어의 보석이다.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시인의 영혼이다.” 40여 년 시를 써오며 시인이 내린 시에 대한 정의이다. 자칫 어그러지면 헛것이나 감상의 나락으로 빠지기 십상인 예술로서의 시와 삶으로서의 시가 시의 전 층위에서 어우러지며 시의 위의(威儀)를 빛내고 있는 시집이 『강변북로』이다. 시인이 10여 년 전부터 열어 놓고 좋은 시들만 엄선해 1천5백여 회원과 같이 읽으며 우리 시대 시의 품위를 가차없이 지키고 높이고 있는 인터넷 카페 〈푸른 시의 방〉이름처럼 변함없이 푸르른 젊음과 시 계속 보여주시길 빈다. (*)
—《시와 표현》2013년 봄호
이경철 / 문학평론가·시인. 동국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중앙일보〉문화부장, 《문예중앙》주간으로 다수의 평론과 산문을 발표함. 2010년《시와시학》에 시로 등단. 저서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외. 공저 『대중문학과 대중문화』외. 현재 동국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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