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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 (金億)

moon향 2013. 12. 6. 20:18

김억 (金億, 1896.11.30~?)

 

 

 

일본식 이름은 岸曙生.
본관은 경주,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며 호를 따라 김안서(金岸曙)로도 종종 불린다.

필명으로 안서 및 안서생(岸曙生), A.S., 또는 본명 억(億)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기범(基範)이며, 어머니는 김준(金俊)이다. 5남매 중 장남이다.

출생 연도는 호적상으로 1896년으로 되어 있으나

김억 유족의 말에 의하면 1895년이라고 한다.


1910년대 후반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창조(創造)>> <<폐허(廢墟)>> <<영대(靈臺)>> <<개벽(開闢)>> <<조선문단(朝鮮文壇)>>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시·역시(譯詩)·평론·수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또한, 김소월(金素月)의 스승으로서 김소월을 민요시인으로 길러냈고, 자신도 뒤에 민요조의 시를 주로 많이 썼다.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를 낸 시인이며

1923년에 간행된 그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으로서 그 특징이 있다.

에스페란토의 선구적 연구가로서 《에스페란토 단기 강좌》를 발표하여 한국어로 된 최초의 에스페란토 입문서를 남겼다.  
김억은 1924년에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베를렌'등 애상적 정서와 음악성을 강조한  프랑스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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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파리의 노래(외) :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선 05-1

 

 

해파리의 노래 (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시집)

 

                       

 

- 김억

  

같은 동무가 다 같이 생의 환락에 도취되는 사월의 초순 때가 되면 뼈도 없

는 고깃덩이밖에 안 되는 내 몸에도 즐거움은 와서 한도 끝도 없는 넓은 바

다 위에 떠놀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한 나의 이 몸은 물결에 따라

바람결에 따라 하염없이 떴다 잠겼다 할 뿐입니다. 볶이는 가슴의, 내 맘의

설움과 기쁨을 같은 동무들과 함께 노래하려면 나면서부터 말도 모르고 라

임도 없는 이 몸은 가없게도 내 몸을 내가 비틀며 한갓 떴다 잠겼다 하며

볶일 따름입니다. 이것이 내 노래입니다. 그러기에 내 노래는 섧고도 곱습

니다.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편집해설한 김억의 명실상부한 전집으로  객관적인 분석과 평가를 통해 한국 근대시 형성에 결정적 공헌을 한

김억의 문학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김억은 우리 근대시사에서 그 유례가 드물 정도로 끈덕지게 서정시를 추구하다가 간 시인이다.

그의 그런 지향은 작품에 쓰인 말을 통해서 가장 단적으로 나타난다. 많은 작품에서 그는 ‘잎'을 ‘닢'으로, 그리고 ‘고운'을 '곱은',

'보드라운'을 ‘보드랍은'이라고 표기했다. 또한 ‘돌아선다지'를 ‘돌선다지'로 축약시켰는가 하면 ‘개미'를 ‘개암',

'마음'을 ‘맘'등으로 바꿔 쓰기도 했다. 이 작업에서 그런 김억의 말들은 최대한 잘 살도록 유의되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철자법으로 보아 명백히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손질이 가해진 것이다